[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사회 곳곳에 숨은 폭력, 쾌도난마식 해결책 있을까

2021. 9. 1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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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D.P.’에 비친 한국사회


한국 군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드라마 ‘D.P.’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세상은 문제투성이다. 그렇지 않다고? 세상은 아름답다고? 내 인생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정말? 그렇다면 축하한다. 다만, 당신과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당신은 바닥없는 꿀통에서 “꿀을 빨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익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문제투성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고? 문제는 불치병처럼 사라지지 않을 테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정말? 그렇다면 유감이다. 다만, 당신과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당신은 이 문제투성이의 세상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가까스로 견디다가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 세상은 문제투성이, 원인도 복잡
가해자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일상 여기저기 산재한 책임의 문제
“내가 풀 수 있다”는 사람 경계해야

인간은 신이 아니고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세상은 문제투성이고, 삶은 온전하지 않다. 당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그러니 세상을 문제와 답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물어야 한다. 이 사태가 문제라면 답은 무엇인가? 이 사태가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가? 그래야 상황을 이해하고,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군대는 어떤가. 넷플릭스에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는 드라마 ‘D.P.’(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는 기시감이 드는 군대 상황을 새삼 문제시한다. 구타·가혹행위·비리·탐욕 등 여러 현상을 묘사한 끝에, 결국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비극적 최후 맞은 탈영병의 질문

여느 사람보다 마음이 더 순했던 일병 조석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 때문에 더 가혹행위에 시달려온 조석봉 일병. 그의 상처와 분노는 마침내 임계점을 넘고,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제대병 황장수를 처단하기 위해 병영을 뛰쳐나와 서울로 향한다.

어떻게 하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과는 반복될 것이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탈영병 조석봉은 가해자 황장수에게 거듭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도대체 왜 나를 그토록 괴롭혔냐고? 왜 구타하고, 모욕을 주고, 억지로 자위행위를 시켰냐고? 비극의 시발점으로 설정된 황장수의 가혹행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탈영병뿐 아니라 시청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황장수는 울먹이며 말한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이것은 ‘D.P.’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다. 황장수의 말대로라면, 가해자는 악행을 저지르자고 큰 결심을 한 끝에 피해자를 괴롭힌 것이 아니다. 자기 짓거리가 지독한 악행임을 의식하면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그런 짓을 해도 된다는 나른한 명분을 가지고 저지른 것이다. 그 명분 아래서 많은 이들이 그간 같은 악행을 저질러 온 것이다. 그래서 가해자는 말한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군대 내 가학행위는 상명하복을 위한 위계적 조직에서 생겨나고, 위계적 조직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에서 생겨났다. 동료를 사살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머뭇거리는 병사들에게 헌병 대장은 일갈한다. 이건 전시 상황하고 다를 바 없어! 남자들은 나빠. 군대는 지독해. 평화가 좋아,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해야 해, 이렇게 나른하게 말해봐야 소용없다. 외적과의 전쟁 가능성이 상존하는 한 군대는 필요하고, 군대가 존재하는 한 상명하복을 위한 위계적 조직의 명분은 살아 있다. 그 명분 속에서 가학행위는 독버섯처럼 자라날 것이다.

명분이 있다고 해서 군대 내 가학행위에 면죄부가 발급되는 것은 아니다. 위계적 조직이라고 해서 다 가학행위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계적 조직은 자칫 가학 행위를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끝내 그런 행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요인들이 거들어야 한다. 군대에 들어와서 보고 들은 것이 그런 짓이었기에 가해자는 그저 따라서 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한번 저질렀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아서 계속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권태로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일반인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권력감을 느끼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책임보다 보신에 치중하는 수장

그러하면 가혹행위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자들이 가지는 폭력성? 일제 식민지 잔재? 그냥 군대문화? 어서 원인을 알려 줘! 그것만 도려내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 같은데! 단일 원인을 찾아내어 단죄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러나 분명하고 단순한 원인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어떤 문제가 오래 잔존해왔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원인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비극의 뿌리가 한국사회 전체에 산포돼 있는 것처럼,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개 해당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져야 할 사람이 불분명한 것은 아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죽은 병사의 누나가 동료 병사에게 묻는다. “(가해 행위가 벌어지는데) 왜 보고만 있었어요?” 위문 온 동료 병사는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왜 그는 보고만 있었을까? 두려워서다.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저항하기 위해서는 수평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군대는 위계를 장려할 뿐 수평적인 조직은 허용하지 않는다. 병사 노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위계를 생명으로 하는 조직에서 저항은 쉽지 않지만, 우선적인 책임자를 판별하기는 쉽다. 위계가 분명한 조직은 권한과 책임을 명시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개선해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우선적인 책임자다. 문제의 무한 반복을 멈추거나 늦출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가 우선적인 책임자다. 드라마 ‘D.P.’에서는 헌병 대장이 바로 그런 책임자다. 조직의 장이 되겠다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 책임지겠다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직의 장이 된 사람은 책임을 지기보다는 보신에 힘쓰는 경우가 많다. 마침내 조직의 장이 된 사람은 대개 높이 올라가고 싶어했던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대개 더 높은 곳으로 승진하고 싶어한다. 무난히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임기 내에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된다. 그래서 위험과 책임을 하청주는 데 열심이다. 스스로 판단할 문제를 부하에게 미루고, 책임 소재를 흐리기 위해 위원회를 증설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탈영병이 자기 머리통을 쏜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이 세상으로부터 나가기라도 해야겠습니다. 당신들만 빨고 있는 이 거대한 꿀통으로부터 전 이만 벗어나겠습니다. 탕.탕.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살아야 하니까 결국 비극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살한 탈영병을 사랑한 사람만 끝내 비극을 잊지 못한다. 그 역시 세상을 바꿀 방법 같은 것은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느낀다. 가해자들과 방관자들이 가득한 내무반에 총격을 가한다. 꿀통은 바꿀 수 없지만, 당신들만큼은 꿀통 속의 시체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 타타타타타.

모든 일엔 부작용, 양질의 선택지 중요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드라마 ‘D.P.’는 이 마지막 총격이 진짜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만 제거되었을 뿐, 세상은 여전하다는 걸 보여주면서 드라마는 끝난다. ‘D.P.’는 문제를 제기하지, 해결책을 제시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자, 그럼 이제 시청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남성을 없애거나, 군대를 없애거나, 전쟁을 없애면 되는가? 과연 어떻게?

방관이나 총격이나 자살이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 대안인가? 여기에 쉽고 확실한 답은 없다. 오히려 쉬운 답이 있는 것처럼,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문제 뒤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가 존재하고 그 음모가만 없애면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 문제의 원인만 쉽게 도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막연하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퉁치는 사람,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약을 파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대안은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 기회비용(opportunity cost)까지 고려하고 있는 사람, 일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기에 다음 세대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양질의 선택지를 마련해주려는 사람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는 아마 이미 소진돼버렸음을 인정하면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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