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5)백맹우와 홍차..중일전쟁 여파에 茶 중심지 떠오른 '윈난'

2021. 9. 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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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맹우는 1893년 중국 윈난(운남)성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윈난성 성도 쿤밍의 법정대학을 졸업했다. 관직에 나가는 것에 줄곧 무관심하다 윈난성 재정청장 육숭인을 만나고는 마음을 바꿨다. 육숭인이 백맹우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윈난성 마흑이라는 지역의 회계 담당관이었다.

마흑은 소금이 생산되던 곳이다. 지금은 흔하디 흔하지만 예전에는 금처럼 귀한 것이 소금이었다. 중국은 소금에 높은 세금을 매겼고 이를 통해 세수를 확보했다. 그렇게 중요한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기에, 마흑의 회계 담당관은 쉽지 않은 자리였다. 백맹우는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회계 담당관으로 봉직한 2년여 동안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인도에서 사용하는 현대식 차 가공 기계.
당시 백맹우는 공무상 맹해 지역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다. 이 지역에는 오래전에 심은 차나무가 많았다.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양이었고 물도 풍부했다. 맹해는 미얀마 국경에서 가까웠는데 국경만 넘어가면 영국에서 닦아놓은 도로가 있어서 교통도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은 여전히 낙후했고 주민은 가난했다.

백맹우가 맹해로 간 시기인 1930년대는 중국 차가 거의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차를 만들어 마셨고, 몇천 년 동안 차 만드는 기술을 독점했지만 영국이 인도에 차나무를 심고 직접 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뒤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은 차 생산에 성공하자마자 기계부터 만들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증기기관을 이용했다. 기계는 놀랄 정도로 효율적이어서 여러 사람이 여러 날에 걸쳐 만들어야 했던 차를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는 중국 차에 비해 품질도 좋았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생산해 유럽에 수출한 차는 품질이 안 좋다고 악평이 났다.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이었으니 장인정신을 갖고 훌륭한 차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돈벌이에 급급해 차에 염색을 하고 톱밥을 섞는 등 부도덕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니 차는 또 얼마나 더럽게 만들었겠는가. 아마 유럽 소비자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마시려다가 머리카락, 닭 털, 바퀴벌레 등이 나와 놀란 일도 많았을 것이다. 기계로 만든 차는 이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인 만큼 인도에서 만든 차가 영국으로 들어갈 때 관세가 없었다. 반면 중국 차는 35%나 되는 무거운 관세를 물어야 했다. 한마디로 중국 차는 인도 차를 상대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윈난성의 남나산, 과거 백맹우는 이곳에 다업실험장을 세웠다. 남나산의 차나무들, 100년 전 백맹우가 심은 차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나 백맹우는 이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가능성을 봤다. 차나무도 많고 교통도 편리하니 이 지역 차나무로 홍차를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 인도 차와 경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곧 자신의 후견인인 육숭인 윈난성 재정청장에게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육숭인도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37년 말과 1938년 봄 사이에 윈난성 재정청 지원으로 다업실험장이 세워졌다. 백맹우는 실험장 대표가 돼 다원을 개발하고 좋은 품종의 차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품질 좋은 홍차를 만들기 위한 제다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영국 사람들처럼 기계로 홍차를 만들어야 세계 시장에서 인도 홍차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 영국산 제다 기계를 구입했다. 기계는 샀지만 다업실험장까지 기계를 실은 차가 지나갈 길이 없었다. 그는 기계를 분해해 소달구지에 몇 조각씩 나눠 실었다. 그리고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거진 밀림을 칼로 베어내고 발로 흙을 다져가며 하루에 조금씩 이동해서 6개월 후 다업실험장에 도착했다. (지금이라면 차로 30분이면 갈 거리다.) 1938년 연말에 드디어 조립한 기계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윈난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계식 차 생산 공장이었다.

영국이 기계로 홍차 만들면서 뒤처진 중국, 영국산 기계 들여와

백맹우는 주로 홍차와 녹차를 만들었는데, 특히 홍차는 기존에 중국에서 만들던 차와는 많이 달랐다. 기존 중국 홍차는 소엽종 차나무 잎으로 만들었고, 백맹우가 만든 홍차는 대엽종 차나무 잎을 원료로 했다. 대엽종 차나무로 만든 차가 맛이 진했는데, 당시 인도에서 생산돼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홍차도 주로 아삼종이라는 대엽종 차나무를 원료로 만들었다. 백맹우가 만든 차는 동남아 여러 나라로 수출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승승장구하던 백맹우에게 시련이 닥쳤다. 범화균이라는 남자였다. 당시 다업실험장과 별도로 국민당 정부가 만든 중국다엽공사가 있었는데, 중국다엽공사가 백맹우와 완전히 같은 생각을 했다. 기계로 차를 만드는 공장을 세우고 맹해의 풍부한 차나무 자원으로 홍차를 만들어서 유럽에 수출할 생각이었다. 중국다엽공사 소속 범화균은 1938년에 맹해 지역을 답사하러 내려왔다. 그는 지역 차나무로 홍차를 만드는 실험을 하고 현지 조사까지 마친 후 중국다엽공사에 타당성을 보고했다. 중국다엽공사는 곧바로 기계식 홍차 생산 공장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공장을 세우는 일은 범화균이 맡았다.

아무리 차나무가 많다고 해도 똑같은 공장 두 개가 들어설 만큼 찻잎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범화균과 백맹우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하지만 윈난성 정부보다 위에 있는 것이 국민당 정부였다. 국민당 정부는 윈난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를 개인이 수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제 이 지역에서 만든 차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돼 나온 범화균만이 수거하고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이게 가능한 것은 비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시작됐는데, 중국다엽공사가 중국 동쪽의 많은 차 산지를 두고 멀고 외진 윈난성까지 와서 차 공장을 세우려고 했던 것도 전쟁으로 차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범화균과 백맹우의 싸움에서 정부를 등에 업은 범화균이 승리한 듯했지만 그의 승리도 오래가지 못했다. 전선이 윈난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수시로 일본군 비행기가 윈난까지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다. 범화균은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범화균은 차를 가공하는 기계와 차를 여기저기 숨겨놓고, 여러 직원과 함께 피난을 갔다. 이후 범화균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윈난에서 나고 자란 백맹우는 윈난을 떠나지 않았다. 공장 직원들과 유격대를 꾸려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후 그가 세운 공장과 기계는 모두 국영 차 공장이 흡수했다. 그리고 그가 심었던 차나무들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울창한 숲이 됐다. 이처럼 백맹우가 중국 차 업계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중국에서 백맹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3호 (2021.06.16~2021.06.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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