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부여 낭만 여행..젊은 사랑꾼들은 부여에 간다

2021. 9. 1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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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가 변하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라는 묵직한 역사적 사명감을 바탕에 깔고, 무왕이 선화 공주를 위해 만들었다는 인공 연못과 성흥산이 선사한 사랑나무 등을 앞세워 오랜 ‘사랑’ 이야기를 지닌 곳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부여는 덕분에 젊은 커플들의 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부여 백마강을 오가는 황포 돛배 ‘백마강유람선’, 백마강의 구드래나루터에 조성된 포토 존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내 의지로 부여에 가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앞두고 (고를 권한도 없으면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놓고 친구들과 투표를 한 적은 있다. 결론은 천 년 전 역사의 선택이 그랬듯이 경주의 압도적 승리였고, 정작 수학여행은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설악산으로 다녀왔다. 그 후로 국내외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수시로 만들던 여행 버킷 리스트에도 부여는 없었다. 망망대해를 내려다볼 전망대나 오색 단풍이 그림 같은 심산유곡이 없으니 볼거리가 없다는 이유였지만, ‘패배한 나라, 망한 나라의 수도를 일부러 가 볼 이유가 뭐냐?’는 비뚤어진 역사관에 사로잡힌 편견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다가 하늘길이 막혀 외국 여행에서 눈을 돌려 국내 각지를 진지하게 여행하면서 우리 땅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 커졌다. 지난 10여 년 동안 국내 여행 콘텐츠는 다양성과 심도가 무한 확장되어 가는 곳마다 기대 이상의 역사 문화 관광 콘텐츠들을 만나고 있다. 계절에 따라 자연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떠나지만,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뽑아 올린 감성적 풍경을 따라가 보기도 한다.

지난 봄부터 지속적으로 내 지도에 표시가 늘어난 곳 중 하나가 부여다. 성흥산성 사랑나무, 궁남지 연꽃, 백제문화단지의 능사 야경 등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젊은 커플들은 참신한 관광 아이템과 예술적 앵글을 찾아내 여행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끌림을 따라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아닌, ‘젊은 사랑꾼들의 부여’를 구경하기로 했다. 가장 남쪽의 성흥산성 사랑나무부터 부여읍에 있는 궁남지와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를 보고, 부여의 가로수길 격인 규암리자온길을 걸어 본 후 백제문화단지 야간 관람으로 마무리하는 코스다.

시간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능산리고분군이 있는 백제왕릉원, 부소산성, 백마강유람선을 타고 낙화암까지 돌아보며 600여 년간 화려하게 고유의 문화를 꽃피우고 일본의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백제를 생각해 보는 여행도 좋겠다. 부여 출신 시인 신동엽의 시 ‘금강’ 제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백제/ 천오백 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별로 오래지 않은, 엊그제에 있는 백제를 반추하게 해 주는 곳, 부여. 다닐수록 부여의 참멋을 알겠다. 크지 않지만 음미할 만한 경관과 역사가 있는 곳이다. 부여에서는 부여스럽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돌아봐야 한다.

▶사랑이 피어나는 성흥산성 사랑나무

느티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반전해 합성하면 하트 무늬가 만들어져서 ‘사랑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흥산성 높은 곳에 있는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부여를 찾는 연인들이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성흥산성이다. 백제 때 축조한 산성인 성흥산성의 성곽을 둘러볼 이유는 충분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목표는 모두 하나, 사랑나무다. 내비게이션에 가림성을 찍고 가면 성흥사 지나 공영 주차장이 나온다. 차를 세우고 200 계단쯤 올라가면 성벽 꼭대기에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근사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나무의 가지 하나가 쭉 뻗다가 구부러졌는데, 그 아래에서 사진을 두 장 찍어 그중 하나를 반전해서 붙이면 아름다운 하트 모양이 생긴다.

이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연인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손 붙잡고 올라가 삼각대 세워 놓고 셀카를 찍는다. 아침 일찍 올라가 찍는 푸른 하늘 배경은 산뜻하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석양 배경은 로맨틱하다. 지대가 높아서 나무 옆에 서면 방해물 하나 없이 일대가 한눈에 보여서 일출과 일몰 전망대로도 유명하다. 좁은 산간 도로라서 해가 지면 운전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산성 초입에 유튜브 ‘영자씨의 부엌’의 영자씨가 운영하는 ‘사랑나무돈까스’ 집이 유명한데, 재료가 소진되면 마감하니 사전 예약해야 한다.

▶서동의 사랑을 담은 인공 연못, 궁남지

무왕이 선화 공주를 위해 만들었다는 인공 연못 ‘궁남지’
궁남지에 활짝 핀 연꽃, 백제의 섬세한 공예 기술을 보여 주는 ‘백제 금동 대향로’
궁남지는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만들었다는 인공 연못으로, 중국 전설 속 신선 세계를 백제 스타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요즘은 순전히 연꽃을 보러 간다. 주변은 금강 하류라서 궁남평야의 배후 습지에 있으니 당연히 연꽃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다. 연못 가운데 ‘포룡정’ 현판을 단 정자가 있고, 연못 주변에 넓은 연밭이 펼쳐져 있다. 한여름에는 분홍빛 연꽃이 피고, 꽃이 지면 널찍한 연잎 우산이 장관을 이룬다. 부여군에서 서동공원으로 조성해 연못에 수중 분수도 설치하고, 공원 곳곳에 그네 벤치를 놓아 낮에는 운동하는 주민들이, 밤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제의 꿈, 백제 금동 대향로가 있는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국립부여박물관, 손가락 크기로 만들어 작지만 세공 기술이 화려한 금동 불상들이 전시돼 있다.
‌백제의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연꽃무늬 기와, 백제의 미소를 보여 주는 ‘서산 마애여래 삼존상’의 복제품, 부여 지역의 선사 시대 청동기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선사 시대의 청동기와 토기 유물부터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 시대의 유물들을 보기 쉽게 잘 정리해 놓았다. 관람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백제 금동 대향로’다. 연꽃을 물고 하늘로 오르는 듯한 용과 봉황 등 상상 속 동물과 17인의 인물상, 5인의 악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봉황의 꼬리가 바람에 날리듯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람객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탄성이 터져 나오는데, 자세히 볼수록 더욱 아름다움이 도드라지는 명품이다. 또한 부여의 상징과도 같은 연꽃무늬 기와들, 백제의 미소를 보여 주는 석불과 금동불 등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물들을 꼼꼼히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

▶백제의 미, 정림사지 오층 석탑

‌정림사지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AR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정림사 터의 금당 안에 있는 ‘석조 여래 좌상’
부여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림사지가 있다. 이곳 역시 성왕이 도성의 중심에 세운 절인데, 절 건물은 사라졌고 현재는 오층 석탑과 금당 안에 고려 시대 때 만든 석불인 ‘석조 여래 좌상’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층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리하는 데 소중한 자료고, 석탑 자체가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앞에 서서 바라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는지라 한 번은 꼭 봐야 할 보물이다. 금당의 석불은 팔다리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덩어리감이 있는 투박한 조각품인데, 시중의 번쩍거리고 화려한 불상만 보다가 이 소박하고 만들다 만 듯한 석불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과 함께 이게 진정한 불상이라 느껴진다.

정림사지박물관에는 정림사 터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인피니티 룸에 전시된 손톱만큼 작은 유물도 AR(증강 현실) 컬렉션을 통해 360도 돌려 보고 확대해 보며 자세히 관찰이 가능해 손으로 만지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첨단 ICT 기술이 접목된 설비들로 VR 기기 없이 즐길 수 있는 360스피어 영상관, 스크린 터치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축조 과정과 발굴 상황을 볼 수 있는 등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세대들의 관심을 끄는 코너가 많다.

근처에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와서 유명해진 식당 ‘시골통닭’이 있다. 어떻게 이렇게 구석진 식당을 찾아냈는지 신기할 정도인데, 백종원 대표의 유명세에 힘입어 부여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되었다. 멀지 않은 굿뜨래 음식 특화 거리에 있는 ‘솔내음레스토랑’에서는 금동 대향로 위의 봉황을 본뜬 화로에 떡갈비를 담고 부여에서 난 연잎에 영양밥을 싼 연잎밥을 내는데, 정갈하고 맛이 좋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미래를 보다, 규암리자온길

시간이 멈춘 듯한 규암리자온길 에 자리한 수공예 편집 숍 ‘부여서고’의 외관과 판매 중인 천연 염색 소품들
담배 가게를 리뉴얼해 만든 북 카페 ‘책방세간’
규암리자온길은 백마강 규암나루터 옆에 있는 작은 길이다. 차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퇴색한 단층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산과 강경에서 수탈한 쌀을 실은 배들이 이 규암나루터를 경유한 까닭에 크고 작은 가게들과 찻집이 즐비한 번화가였으나, 1960년대에 백제대교가 놓여 나루터가 유명무실해지자 쇠락의 길을 걸었다. 몇 년 전부터 지역 문화 유산을 기반으로 도시 재생에 힘쓰는 이들이 모여 ‘자온길프로젝트’를 만들었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문화 예술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80년 된 담배 가게는 책방이 되었고, 오일장의 주막은 공방으로, 부여 부잣집의 한옥은 한옥 숙소로 변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시간이 멈춘 곳, 흑백 사진이 어울리는 곳으로 규암리자온길이 천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래 담배 가게였던 ‘책방세간’은 담뱃갑 속 은박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벽을 반짝이는 은박으로 장식해 놓고 시원한 에이드 메뉴들을 판매하고, ‘금강사진관’에서는 저마다의 고유한 서사를 흑백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영정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기도 한다. 동남아시아의 라탄 소품이나 천연 염색 소품 등을 판매하는 ‘부여서고’는 책방이 아니라 수공예품 편집 숍으로 운영 중이다. 이 집 안주인은 길 끝에서 염색 체험을 할 수 있는 ‘목면가게’를 운영하면서 전통 염색을 널리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야간 데이트 코스로 좋은 백제문화단지

능산리고분군에 있었던 능사를 재현한 곳,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한 사비궁. 백제 전통 의상과 어좌 체험이 가능하다, 젊은 커플들을 위한 소망의 종 달기
한옥으로 지어 분위기가 좋은 숙소 겸 카페 ‘무드 빌리지’, 백제문화단지는 넓은 대지에 펼쳐져 있어서 편안한 관람을 위해 사비로열차, 전기어차, 전기 인력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솔내음레스토랑의 주요 메뉴. 부여의 특산물 연잎을 이용한 연잎밥과 백제 금동향로 모양의 화로에 구워 내는 떡갈비가 유명하다.
백제문화단지는 화려했던 백제 문화를 돌아볼 수 있도록 330만㎡(약 100만 평)의 땅에 국가 무형 문화재 장인들의 솜씨로 사비궁과 능사, 위례성 등을 재현한 곳이다.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대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가 느껴진다. 능사와 사비궁 등은 백제의 섬세한 건축 양식을 보여 주고, 백제 건국 초기의 위례궁과 고상가옥 등을 재현했다.

단지가 넓어서 사비로열차나 전기어차, 전기 인력거 등을 타고 돌아볼 수 있고, 백제 의상 및 어좌 체험, 소망의 종 달기, 전통 놀이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코로나19로 일부 프로그램은 중단 상태다). 낮에 건축물을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야간 개장에 맞춰 가면 색다른 궁의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인근에 새로 한옥을 지어 카페와 숙소로 인기를 얻고 있는 ‘무드 빌리지’가 있다. 두 채의 큼직한 한옥과 솟을대문이 근사해서 들어가 구경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여행을 갈무리하기에 좋다.

[글과 사진 신혜연 (헤이컴 대표,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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