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20주기 맞아 새롭게 조명받는 미국의 '고문 흑역사'

강창욱 2021. 9. 14.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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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관타나모 고문 피해자 인터뷰
국가안보 명목 잔혹하게 심문 자행
누명 쓰고 15년 수감생활 트라우마
지난 2002년 3월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이 저녁 기도를 위해 준비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9·11테러 20주기를 맞아 그날의 악몽과 상처를 되새기는 한편에서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자행한 고문의 흑역사가 국제사회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2일(현지시간) 서아프리카 모리타니에서 만난 관타나모 고문 피해자 모하메드 울드 슬라히(50)와의 인터뷰를 전하며 “테러 후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잔혹하게 자행한 심문의 결과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모리타니인인 슬라히는 9·11테러 후 관련자로 지목돼 2002년 8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됐다. 미 정보 당국은 그가 1999년 11월 독일에서 9·11테러범들을 접대한 사실 등을 종합해 테러 가담자로 결론지었다.

수용소에서 간수들은 슬라히를 맹견으로 위협하고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때렸다고 한다. 족쇄로 묶고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과 강한 조명으로 괴롭혔고, 얼음물에 흠뻑 적셔 몇 달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슬람에 대한 신념을 흔들기 위해 자기 옷을 벗고 성적으로 더듬은 여성 간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테러 계획에 가담했음을 인정하라고 강요한 심문관이었다고 슬라히는 NYT에 말했다. 심문관은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네 어머니를 납치해 유린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는 슬라히에게 그는 “나는 정의를 찾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우리나라 건물에 부딪치는 걸 막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슬라히는 몇 달간 이어진 심문 끝에 캐나다 토론토의 고층 빌딩인 CN타워를 폭파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시인했다. 나중에 그는 이 자백이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며 무죄를 호소했다. 정작 심문 전까지 그런 고층 빌딩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는 15년 가까운 수감생활 끝에 2016년 석방됐다. 군검찰은 심문 과정의 잔혹성을 들어 슬라히의 자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기소 담당자였던 스튜어트 카우치 해병대 중령이 관타나모 심문실에서 나체로 족쇄가 채워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헤비메탈 음악을 듣고 있는 다른 수감자를 우연히 목격한 것이 계기였다. 슬라히는 관타나모로 옮겨질 때처럼 눈가리개와 족쇄를 찬 상태로 고향 모리타니로 돌아갔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슬라히는 석방 직후 유튜브 메시지를 통해 “구금된 동안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며 “용서는 나의 무한한 자원”이라고 말했다.

NYT는 “하지만 그가 관타나모에서 겪은 일의 결과는 결코 그의 뒤에 있지 않다”며 슬라히가 불면증, 부주의, 과민반응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만성 허리통증과 청각장애 같은 고문 후유증도 남아 있다.

신문은 “2001년 9월 11일의 공격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법적, 도덕적 제약을 제쳐두게 했다”며 “고문의 유산은 미국에나, 슬라히에게나 이후 20년 동안 복잡하고 다면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해설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와 고문 이력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권을 강조할 때마다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왔다. 지난 6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들에게 미 중앙정보국(CIA)이 외국 비밀감옥에서 고문을 자행했음을 상기시키며 “그게 인권이냐”고 반문했다.

NYT는 “정부가 승인된 고문으로 눈을 돌린 그 선택은 국가 명성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며 “다른 지역에서 억압에 맞설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슬라히는 석방 직전인 2015년 회고록 ‘관타나모 일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미 당국 검열 과정에서 대폭 수정돼 출판됐다가 2017년 해당 내용을 되살려 다시 나왔다. 이를 원작으로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모리타리안’은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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