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⑥] 제목부터 어려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홍종선 2021. 9. 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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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 원작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 ⓒ이하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를 보고 났을 때 통째로 내 것이 된 듯한 충만함이 작은 행복을 준다. 반대로, 영화를 다 봤는데도 줄거리가 ㄱ에서 ㅎ까지 꿰지지 않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장면이 한 다발일 때 이해력의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수입 화인픽처스, 배급 팝엔터테인먼트, 2011)가 후자의 경우다.


OTT(Over The Top, 인터넷 TV 서비스) 시대, 내 손 안의 단말기로 영화를 볼 수 있고 언제든 ‘일시정지’와 ‘되감기’를 할 수 있으니 제아무리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도 온전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사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간단히 몇 가지만 파악하고 내로라하는 남자 배우들이 총출동한 명연기의 향연만 즐겨도 충분하다. 그 몇 가지란 배경과 은어 두어 가지다.


미국과 소련, 영국의 첩보전이 대단했던 1970년대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서커스’라 불리는 영국정보국 안에 잠입한 ‘두더지’(이중첩자, 극 중에서는 소련 KGB가 영국 서커스 안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색출해 내는 이야기다. 서커스는 영국의 비밀정보국 M16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서커스의 국장은 ‘컨트롤’로 불린다.


누가 '두더지'일까 ⓒ

더불어, 영화의 제목은 영국의 전래동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놀이의 일환으로 팅커(땜장이), 테일러(재단사), 솔저(군인), 세일러(선원), 리치맨(부자), 푸어맨(가난뱅이), 베거맨(거지), 띠프(도둑)라고 직업의 종류를 열거하면서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듯 부르는 노래란다.


영화에서는 헝가리 장군으로부터 서커스 수뇌부에 두더지가 존재한다는 제보를 받은 컨트롤(존 허트 분)이 체스판에 올려놓은 5개의 말에 붙어 있는 얼굴 사진에 응용됐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그 5명의 이름을 말할 수 없지만, 그 역할과 순서가 기막히다. 영화를 세밀히 보는 분이라면 이 장면에서 이미 스파이를 알 수 있다. 두더지 색출에 기용된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 분)가 다섯 번째 말에 놓인 것도 기막히다. 제목엔 네 번째까지만 있다.


제목의 의미, 서커스-두더지-컨트롤의 뜻, 시대 배경까지 알았으면 이제 스마일리의 두더지 색출 과정을 따라가기면 된다. 그 과정에서 알기 어려운 상세한 부분은 슬슬 흘려보내도 괜찮을 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끝내 준다.


두더지 사냥꾼, 조지 스마일리 역의 배우 게리 올드만 ⓒ

먼저 두더지 사냥을 진두지휘하는, 조지 스마일리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마치 총성 없는 첩보영화 ‘공작’(감독 윤종빈)처럼, 특별한 액션 없는 스파이영화가 가능했던 건 긴장을 구축하고 조여가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상대방의 내면을 꿰뚫는 눈빛, 총보다 더 무섭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냉정한 말은 스릴 넘친다.


신념의 첩보원, 피터 길럼 역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

스마일리에 의해 두더지 색출 작전에 기용돼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하는 피터 길럼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다. 전래동요로 치면 ‘도둑’ 역할인데, 스마일리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올곧은 인상의 컴버배치가 연기한 덕에 그의 행동은 불법이 아니라 정의로 해석되는 가능성을 높인다. 어벤져스 시리즈보다 한결 젊은 느낌의 컴버배치를 보는 신선함도 있다.


체스판에 말을 세운 컨트롤 역의 배우 존 허트 ⓒ

영화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줄거리 상에서는 중요한 인물인 올리버 라콘 재무부 차관 역할의 배우 사이먼 맥버니의 연기는 숨소리까지 관객을 몰입시킨다. 영국 연극계를 넘어 세계적 연출가이자 배우인 맥버니를 보는 것만으로 반갑다. 등장이 잦지 않아도 지위가 높고 결정권을 쥔 역할에 연기력 좋은 배우가 캐스팅돼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같은 맥락에서 일찌감치 퇴장하지만, 영화 초반 ‘컨트롤’의 위치와 역량이 어떠한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배우 존 허트의 에너지도 너무 좋다.


사랑에 빠진 스파이, 리키 타르 역의 톰 하디ⓒ

기존 작품들과 사뭇 다른 이미지를 과시, 즐거움을 주는 배우들도 있는데 콜린 퍼스와 톰 하디이다. 톰 하디는 사랑에 빠졌을 때의 눈빛,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할 때의 탄식과 한숨을 절절히 연기했다. 사랑에 빠진 스파이, 첩자로 몰려 쫓기는 두려움, 소련과 영국 모두의 표적이 되어 숨을 곳 없는 리키 타르의 절박함이 영화의 시침을 재촉한다.


동료의 아내를 탐하다 남편에게 딱 걸린 스파이, 빌 헤이던 역의 콜린 퍼스 ⓒ

빌 헤이던을 연기한 콜린 퍼스는 언제 나오는 거지? 스타배우답게 특별출연인가 싶을 때부터 후반으로 갈수록 출연 의미를 보여 준다. 일종의 반전 캐릭터다. 그러나 그 존재감은 감추기 어려워서 영화 초반 서커스 수뇌부 회의 때 줌아웃 처리돼 있고 대사 하나 없음에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화면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연기의 장인이다.


고독한 스파이, 이중생활의 정석, 짐 프리도 역할의 배우 마크 스트롱 ⓒ

또 한 명의 반전을 보여 주는 인물이 있는데 마크 스트롱이 연기한 짐 프리도이다. 컨트롤이 믿고 선택한 요원으로, 부다페스트에 가서 헝가리 장군을 만나 두더지가 누구인지 직접 듣고 오라는 특명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마크 스트롱을 좋아하는 탓에 영화 초반 총을 맞았을 때 벌써 퇴장인가 아쉬웠는데 역시나 비밀리에 살아 있었고, 또 다른 결정적 비밀을 지닌 인물이다. 컨트롤과 스마일리 사이의 땜장이(팅커) 역할이라 할 퍼시 엘르라인은 개성파 배우 토비 존스가 연기했는데, 서커스를 떠날 때의 쓸쓸하고도 이 악문 표정이 일품이다.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마지막 장면 ⓒ

코너 제목 ‘결정적 장면’에 맞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두 장면을 얘기할 차례다. 하나는 정말 그래야 했을까 싶은 씁쓸한 장면, 다른 하나는 오! 좋은데 싶게 신선했던 장면이다.


전자는 영화 포스터로도 쓰였는데, 조지 스마일리가 모든 일을 마치고 서커스로 돌아와 수뇌부 회의 상석에 앉는 장면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고, 게리 올드만의 연기만 보면 더할 나위 없는 명장면이다.


씁쓸한 지점은 과연 세대교체가 이뤄진 마당에 스마일리가 다시 돌아와야 했는가다. 물론, 서커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두더지를 색출했고, 그 과정에서 첩보 능력과 판단력과 용인술을 입증한 것도 사실이지만. 후배 피터에게 말했듯 조지 자신도, 이중첩자를 통해 서커스를 쥐락펴락하는 KBG의 칼라도 은퇴하면 좋았을 시기가 과거에 있었다. 스마일리 개인에 대해서는 아닐망정 이전 수뇌부에 대한 후배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마당인데, 이참에 쇄신하면 어땠을까.


노인 연기에도 탁월한 명배우, 강물 수영 장면은 인상적 ⓒ

후자는 두더지 사냥팀 리더 조지 스마일리와 재무부 차관 올리버 라콘의 결정적 판단의 순간이다. 자료를 모을 때는 냉철한 직업인으로 보이던 그들이 정보와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선택을 하는 순간에는 자연인 조지와 올리버로 돌아가 각자 좋아하는 곳으로 간다. 조지는 강에 가서 수영하고, 올리버는 사우나에 가서 목욕한다. 비가 잦은 영국에서 또 물을 찾아선지 유독 눈길이 간다.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무념무상 수영하고 목욕했을 그들이 물 밖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이에게 결정을 말한다.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할 때, 이제 더는 고민 말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찾을 곳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운동 수행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나 절차를 루틴(routine)이라고 하듯, 우리도 고심을 끝내고 판단을 최적화하기 좋은 장소나 습관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강물 수영처럼 어렵지 않아도 동네 사우나 가는 수준의 그 어떤 것을 창안해 보자. 그곳에 가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매직아이처럼 떠올라 우리 안으로 쑥 파고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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