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사람'..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김상목 2021. 9. 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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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좋은 사람>

[김상목 기자]

▲ "좋은 사람"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찬란
 

1.역설 그 자체인 제목

인공적인 유토피아란 지속될 수 없다. 애초에 '유토피아'라는 어원 자체가 현실에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속가능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만들고 유지하려는 덧없는 노력은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개인의 행동과 처신 역시 그렇다. '좋은 사람' 또는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건 괜찮은 일이고 보람된 평가이긴 하지만 그것이 지상목표가 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아닌 남들에게 평가받기 위해 정작 자신의 행복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좋은 사람>의 짧고 묵직한 제목은 그런 모순된 상황이 영화 속에서 펼쳐질 것이란 예고를 시작부터 선포한다.

인간이란 양면성을 넘어 다면성을 지닌 존재다. 선인 혹은 호인이란 타이틀은 흔히 통용되지만 개별 인격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규격화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바깥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자기 가족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거나, 그 역의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목격된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장편 데뷔작으로 <좋은 사람>을 선보인 정욱 감독은 그런 모호한 균열을 후벼 파내듯 밀어붙이는 연출로 잔혹한 깨달음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2.인물들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설정의 치명성

영화가 시작되면 고등학교 교실에서 주인공 경석(김태훈)이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돈이 없어진 건에 대해 자수를 유도하는 중이다. 하지만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다. 경석은 누구도 돈을 훔치지 않았다 하니 자신이 책임진다며 돈을 잃은 학생에게 자신이 대신 잃어버린 액수만큼의 돈을 준다. 하지만 비밀은 지켜지지 않는다. 곧 사실이 알려지고 경석은 난감해 한다. 그는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자 학생들을 아끼는 모범교사로 보인다.

그러나 곧 석연찮은 풍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학생 중 누군가가 경석의 학급에서 외톨이인 세익(이효제)이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고 제보한다. 경석은 세익을 추궁하지만 세익은 꿍한 표정으로 자신은 돈을 훔친 게 아니라 주장한다. 경석은 공명정대한 태도로 제자를 믿겠다고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이제 관객은 경석의 표정과 행동에서 벌어진 틈을 유심히 살피며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할 법하다.

경석과 별거 혹은 이혼상태로 추정되는 지현(김현정)이 갑자기 연락한다. 급한 일 때문에 둘 사이의 딸 윤희를 며칠만 맡아달라는 부탁이다. 하지만 경석은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지현은 노파심 수준을 넘어 과도하게 이것저것 경석에게 윤희를 잘 돌보라고 요구한다. 한번 의심을 시작한 관객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뭔가 석연찮다. 윤희는 아빠인 경석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대화는 물론 모든 접촉과 관계를 거부한다.

세익 일로 심란하던 경석은 자신을 거부하는 윤희에게 짜증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런데 경석은 세익에게 결백하다면 작성해서 제출하길 요구해둔 자술서를 확인해야 한다. 학교에 가야할 상황에서 경석은 윤희와 서로 내키지 않는 동행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딸을 달래보지만 아이는 아빠와 대체 무슨 불화가 있었는지 뭐든 거부할 따름이다.

급기야 욱한 경석은 화를 참지 못해 딸을 윽박지른다. 하지만 곧 아이를 달랜 뒤 세익을 보러 같이 가자고 하지만 딸은 이것조차 거부한다. 어쩔 수 없이 차 안에 윤희를 남긴 채 세익에게 다녀오지만 (그가 기대했던 자술서나 자백 대신) 백지만 남긴 채 제자는 나가버린다.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오니 얌전히 차 안에 있으라던 딸은 사라져버렸다. 아이를 찾아 헤매던 경석은 딸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음을 경찰서에서 듣게 된다. 경석의 공적 임무와 사적 생활 모두 파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달려온 지현은 경석을 맹렬히 규탄한다. 감정의 골이 어지간히 깊었는지 흔히 부부나 연인 관계가 파국을 향할 때 보이는 언쟁의 전형-10년 전 일까지 다 끄집어내 무한 반복되는-이 시작된다. 게다가 일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튀기 시작한다. 사고를 낸 나이든 트럭 기사는 어떤 남학생이 딸을 도로로 밀었다고 주장한다. CCTV에는 세익이 윤희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찍혀있다. 경석에겐 딸의 사고로 인한 위기와 세익에 대한 의심의 위기가 서로 결합되어 미스터리의 나선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세익의 주장과 운전기사의 주장은 서로 엇갈리고 둘은 각자 자신을 믿어 달라 호소한다. 지현은 경석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불신하고 둘의 불화는 회복 불가능 수준으로 치닫는다. 경석은 교사로서의 중립과 부모로서의 진상규명 사이에서 극심한 혼란 속에 무엇이 진실인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할지, 그리고 자신의 본심은 대체 뭔지조차 갈팡질팡하게 된다.
 
▲ "좋은 사람"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찬란
 

3.내가 아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혼란과 파국의 정해진 궤도로 폭주하기 시작한 영화에서 결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주요 등장인물들의 면모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 마냥 마구 요동치는 중이다. 영화 속 경석의 상황에 관객 또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빨려 들어갈 판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아내였던 지현과 딸 윤희는 모범교사의 전형으로 보이던 경석을 그렇게도 불신하고 혐오하는 걸까? 세익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정체가 뭘까? 운전기사의 말은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 진실인 걸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영화 초반에 펼쳐졌던 기본 설정은 무엇 하나 신용할 수 없다. 경석이 담임인 학급의 아이들은 과연 화면에서 보이는 모습만이 전부인 것일까. 관객은 알 수 없는 비밀스런 그림자가 안개처럼 시야를 가린다. 경석이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감독은 끊임없이 떡밥과 미끼를 흩뿌려대며 관객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끝내 경석은 지금껏 자신이 노력하며 쌓아 올려왔던 '좋은 사람'이라는 간판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하면서도 강박적으로 그가 추적하던 진실에 도달(했거나 스스로에게 그렇다고 자기암시를 걸거나)한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로 감행한 모험 끝에 발견한 진상은 결코 시원하지도 후련하지도 않다. 진실은 내 기준에 맞춤형으로 정리될 수 없다.

'좋은 사람' 경석이 완벽하게 영화 초반에 관장하고 있는 것 같던 자신의 학급과 주변의 소우주는 실제로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이기적 집단지성들, 노회한 트럭 운전사와 영악한 학급 아이들과의 대립 구도에서 경석은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다. 좋은 남편이자 좋은 교사라는 타이틀을 부여잡던 그의 노력은 철저히 붕괴한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그는 자신이 거스르려던 운명에 패배했음에도 품위 있는 퇴장을 선보인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인간으로서 재기하고 갱생할 여지는 남긴 결말인 셈이다.

4.강렬한 설정을 떠받치는 배우들의 열연

경석 역을 맡은 김태훈 배우는 시작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이라는 허깨비 가면을 놓고 망설이고 갈등하며 극을 강렬하게 끌고 나간다. 원래 정평이 난 연기자이지만 특히 <좋은 사람>에서는 엔진 그 자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하나 둘 관객이 뚜렷한 설명 없이도 추측하게 되는 경석의 과거 행적이지만 초반에 아내 지현과 딸 윤희의 그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히스테릭하게 비쳐질 만큼 김태훈의 연기는 관객을 끌어당기는 위력을 선보인다.

김태훈 배우의 경석이 예상 가능한 돌파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면 아역 연기자이지만 이미 다수의 작품에서 만만찮은 경력을 축적하고 있는 세익 역의 이효제 배우는 '발견'되는 캐릭터다. 김태훈 배우와 팽팽하게 합을 겨루며 미스터리의 주축인 세익을 훌륭히 재현해낸다. 역시 다양한 경력을 선보여온 지현 역 김현정 배우의 열연도 돋보이지만 본 작품이 경석과 지현의 과거 결혼생활에 대해 거의 설명하지 않기에 전반부에서 경석을 상대로 폭발하는 순간들이 단조롭게 느껴지던 연출은 좀 아쉽다. 사고를 내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노회한 면모를 드러내는 운전기사 '형섭' 역 김종구 배우의 관록 또한 유심히 관찰할 보람이 충분하다.

그래도 역시 그 무엇보다 김태훈 배우의 검증된 연기선이 튼튼하게 영화 전체를 떠받친다. 배우의 대표작 중 하나인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제목이 본 작품과 기이한 궁합을 이루는 기분이다. 선과 악의 모호함을 간직한 배우의 이미지를 <좋은 사람>은 철저히 활용해낸다.
 
▲ "좋은 사람"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찬란
 

5.화사한 보도블록을 뒤집으면 드러나는 것들

<좋은 사람>은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극의 전개구조에 <라쇼몽>의 상대주의, 프랑스 19세기말 자연주의 경향이 조합된 구성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게 묘사하고 투영시킨다. 작은 규모의 영화지만 휘몰아치는 감정 선의 파고는 결코 높낮이가 간단하지 않다. 갈등과 혼란이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용암처럼 분출하다 식어서 굳어져버린 자갈밭 같은 스산한 풍경을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 속 배경이 현대 한국사회에서 확산 일로인 이혼 또는 별거 중 가족의 현실과, 구성원 상호간에 공감 불가능한 공간이 되어가는 학교현장이기에 모호함과 불신의 씨앗은 (현실과의 싱크로를 통해) 영화 전개 내내 마음껏 싹트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좋은 사람>은 작금의 관객들이 선호하는 힐링 치유물도, 시간 때우기 용 코믹 액션물도 아니다. 독립영화에서 기대해볼 법한 소박한 휴먼 드라마와도 동떨어진 존재다. 나 자신은 진한 생채기 혹은 옛 상처를 기억해내기 위해 후벼 파듯 자해하는 강렬한 체험을 겪었지만 흔쾌히 주변에 추천을 권하기는 망설여질 법한 작업에 가깝다. 다소 도식적인, 설정을 위한 설정의 면모도 보이지만 크게 구멍나지 않는 탄탄한 전개와 빤하지 않는 서늘한 결말이 감독의 결기와 연출력 포트폴리오로 합격점을 받을만한 결과물이다.
 
작품정보

좋은 사람 Good Person
2020|한국|미스터리
2021.09.09. 개봉|101분|12세 관람가
감독 정욱
주연 김태훈(경석), 이효제(세익), 김현정(지현), 김종구(형섭), 박채은(윤희)
출연 고관재, 김범수, 윤진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배급 싸이더스
공동배급 찬란
 
2020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아트하우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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