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맛이 좋아! 21세기 한국인의 #매운맛 연대기

이경진 2021. 9.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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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닭볶음면에서 마라탕, 로제 떡볶이로 이어지는 매운맛의 서사는 이제 어디로 향할까?
매운맛은 알다시피 맛이 아니라 통각이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은 외부 자극과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혀를 강타하는 고통 뒤에 통쾌하고 짜릿한 희열이 뒤따르는 이유다. 최근 들어 매운 음식이 가열차게 유행하는 현상은 넷플릭스에 좀비물이 쏟아지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매운맛 계보가 예전과 달리 다소 흥미롭다. 2010년, 하얀 라면에 대한 반대 심리에 불황이 겹치면서 불닭볶음면과 같은 극강의 시뻘건 매운맛이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매운맛의 높은 강도에 집중하던 흐름은 갑자기 물길을 선회했다. 마라탕이 등장한 것이다. 마라탕은 화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신도림동, 대림동 등을 찾아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2017년을 기점으로 서울 중심부에서 한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전문 프랜차이즈가 등장하며 도심 곳곳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유가 뭘까. 미시적 관점으로 보면 하루아침에 맥락 없이 유행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동북아시아를 감도는 큰 흐름이 작용한 필연의 결과다. 마라는 중국에서도 2000년대 중반 들어 뒤늦게 전국구 음식으로 거듭났다. 중국을 통일한 마라가 그 기세를 몰아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점령한 것. 흥미로운 것은 마라탕이 유행하며 청양고추의 매운맛만 알던 우리가 산초, 후추의 이색적인 매운맛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서울에는 번화가마다 마라 전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입 안이 얼얼한 매운맛과 마라 특유의 향신료 향은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맛이 강렬한 만큼 빨리 물리는 경향이 있었다.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 보다 대중적인 매운맛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로제떡볶이다. 매운맛에 취약한 ‘맵린이’ ‘맵찔이’도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렇게 매운맛의 계보를 이을 차세대 주자는 로제떡볶이가 됐다.

로제떡볶이는 고추장 등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의 떡볶이 양념에 ‘유크림’을 가미한 요리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추장이 기본 양념인 만큼 마라처럼 호불호가 갈리지 않으며, 유크림을 넣어 ‘맵린이’와 ‘맵찔이’도 포섭하고, 이국의 맛이 가미된 맛. 확실히 MZ세대는 매운맛만큼 이국적 터치를 중요한 매력 포인트로 새롭고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로제떡볶이는 소스의 변형만큼 주재료 또한 흥미롭다. 마라탕에 넣던 콴펀, 분모자 등의 중국 당면을 적용한다. ‘쌀떡이냐’ ‘밀떡이냐’ 하는 다소 진부한 논쟁이 일던 판에 뉴 페이스가 등장한 것이다. 크림을 더했으니 ‘맵부심’ 강한 사람들은 시시해할 것 같다고? 전혀 아니다. 로제떡볶이는 매운맛을 단계별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한편 로제떡볶이의 유행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며 배달 음식이 일상화된 현실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로제떡볶이는 마라보다 가격 면에서 부담 없고, 크림이 들어가며, 기본으로 첨가되는 밀떡과 필수 옵션인 분모자 등은 식어도 불지 않는다. 여러모로 혼자 배달하여 여러 번에 나눠 먹기에 적당하다. 식으면 더 맛있다는 의견도 있다.

‘주반’의 헤드 셰프 출신인 권영웅 셰프는 “우리나라는 매운맛을 즐기는 데 있어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말한다. 전 세계 어느 민족보다 맵부심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크게 분노할 만한 소리다. “한식에는 매운 음식이 많지만, 실제로 쓰이는 고추의 품종은 무척 한정적이에요. 동남아시아나 인도, 멕시코 등을 보면 한 가지 음식을 완성하는 데 서너 종류의 고추를 활용해요. 품종별로 매운맛의 강도도 제각각이고 매운맛 외에도 고소한 맛, 산미, 과실 향 등 다채로운 풍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풍미를 모른 채 캡사이신의 매운맛만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 셰프는 우리나라가 국제화, 세계화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입맛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 입맛에 맞게 현지 음식의 맛을 길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최근 흐름을 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마라, 로제 등 이국적 터치가 가미된 음식을 즐기며 떡볶이에도 떡이 아닌 분모자 등을 넣는 걸 보면 확실히 사고나 입맛이 점점 개방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제주도에 내려가 ‘스누즈(Snooze)’라는 가게를 차린 권 셰프는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고추를 활용해 고추의 복합적인 맛과 매력을 알릴 예정이다. 우리처럼 맵부심 강한 민족이 매운맛의 매력적인 향과 색감이 뿜어내는 다양한 레이어에 눈뜬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고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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