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캔버스는 책.. 그림의 힘만으로 감정·기억 건드리죠"

김남중 2021. 9. 1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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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가] 이수지 그림책 작가
이수지 작가가 지난 5일 서울 한남동 알부스갤러리에서 새로 출간한 그림책 ‘여름이 온다’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곳에선 ‘여름이 온다’에 사용된 원화 등 이수지 그림들을 전시 중이다. 최현규 기자


서울 한남동 알부스갤러리에서 ‘여름 협주곡’(Summer Concerto)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림책 작가 이수지(47)의 신작 ‘여름이 온다’(비룡소) 출간과 함께 진행되는 전시회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갤러리 전체를 이수지 그림으로 채웠다. 비발디 협주곡 ‘사계’ 중 ‘여름’을 그림 이야기로 재구성한 ‘여름이 온다’에 사용된 원화뿐만 아니라 이수지의 데뷔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대표작 ‘파도야 놀자’도 볼 수 있다. 지난달 4일 시작된 이 전시회는 19일 종료 예정이었으나 최근 전시 기간 연장을 결정, 다음 달 10일까지 계속된다. 거리두기에 따른 관람객 제한 속에서 전시회 티켓이 조기 매진된 데다 관객들의 호평과 연장 요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이수지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책 박물관인 에릭칼뮤지엄은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출간된 글 없는 그림책 중 21편을 골라서 보여주는 ‘스피치리스: 말이 없는 그림책의 예술’(Speechless: The Art of Wordless Picture Books) 전시회를 지난 7월 시작했다. 이 전시회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된 게 이수지의 그림 ‘파도야 놀자’다. ‘파도야 놀자’는 이수지를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2008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돼 뉴욕타임스의 ‘우수 그림책’에 선정했다. 이 책은 현재까지 13개국에서 출판됐다.

이수지 작가를 세계에 알린 그림책 ‘파도야 놀자’의 한 페이지. 비룡소 제공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8일 개막된 ‘볼로냐 그림책 일러스트 특별전’에서도 이수지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어린이책 도서전인 이탈리아의 ‘볼로냐 아동도서전’이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세계 순회 전시로 50명의 참여 작가 중 한국 작가는 이수지가 유일하다.

이수지는 세계적인 작가다. 새 책을 낼 때마다 해외에서 판권 문의가 이어진다. 하지만 국내에선 아동도서 분야를 제외하면 그를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림책=어린이책’이라는 편견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알부스갤러리에서 만난 이수지는 “네이버에 제 이름을 검색하면 ‘동화작가’라고 나온다”면서 “저는 동화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인데, 동화책과 그림책을 구분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한국에는 그림책이라는 장르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이수지에게 그림책은 동화책이 아니다. 어린이책도 아니다. “그림의 힘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림이라는 예술과 책이라는 예술이 결합한 고도의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0세부터 100세까지 포괄하는 책”이다.

전시장 벽에는 “이수지 작가는 나이와 그 밖의 다양한 차이를 뛰어넘어 어른과 어린이 모두를 웃게 만든다”고 한 미국 국회도서관북페스티벌 프로젝트 매니저 제니퍼 가빈의 말이 적혀 있다. 그의 전시회는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성인 관객, 특히 젊은 층이 많이 찾아왔다. 두 번 세 번 전시를 보는 사람이 있고, 소장용으로 그림책을 한 권 더 사는 사람, 집에 걸겠다며 그림을 사 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수지는 “전시회 다녀간 관객들이 남긴 코멘트를 보면 ‘힐링이 됐다’는 얘기가 가장 많다”면서 “그림책이 어른들도 즐기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림책을 보는 성인이 늘어나는 건 출판계에서도 주목하는 현상이다. 이수지는 “그림책은 어린이를 향한 매체이기 때문에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그게 어른들에게 다가왔을 때 임팩트가 더 큰 것 같다. 삶의 진실이 담긴 단순하고 직관적인 메시지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며 “그림책의 그런 가치를 어른들이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수지는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좋아해서 그림책 작가가 된 경우가 아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책이라는 매체에 매력을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북아트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림과 책에 대한 관심이 합해져 그림책으로 나아간 것이다. 화가 이수지가 선택한 캔버스가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이라는 게 나는 참 신기하다. 책은 예술품인데 아무 데서나 돈 조금만 주면 살 수 있다. 대량 생산 하는 예술이고, 싼 가격에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예술이고, 늘 지니고 다닐 수도 있는 예술이다. 이렇게 훌륭한 예술 매체라는 점에서 책을 너무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내 매체는 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북아트를 공부하며 혼자 만든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되며 이수지의 첫 책이 됐고 국내에서는 2015년에 나왔다. 이번 전시회에 당시 원화들이 소개돼 관객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데뷔작이지만 실험성과 예술성이 매우 강하다. 책을 하나의 무대로 보는 시각, 표지를 넘기는 순간 낯선 세계로 빠져들고 뒤표지가 닫히면 꿈에서 깨어나는 구성 등 이수지 특유의 작법이 여기서부터 나타난다. 이수지는 “내 작품의 원형과 같은 책이고, 이후의 모든 작품은 여기서 파생돼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수지의 작업은 아트북 또는 북아트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수지 그림책의 특징으로 꼽히는 ‘글 없는 그림책’이나 ‘책의 물성에 대한 적극적 실험’은 책과 예술을 결합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는 책장을 넘기는 방향, 책 중간의 제본선, 판형, 종이의 질감과 사이즈 같은 책의 기본 골격조차 허물고 재구성하면서 주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그는 “굳이 텍스트를 덧붙일 이유를 찾지 못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림으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야기가 열려 있고, 여러 각도로 읽힐 수 있고, 다양한 독자층이 볼 수 있다. 음악이 그렇듯 감정을 건드리고 기억을 건드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2019년 한국출판문화상은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작으로 이수지의 그림책 ‘강이’를 선정하면서 “그림책을 통해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고 평가했다. 이수지의 20년에 걸친 그림책 작업이 가닿고자 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말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예술을 경험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그림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서 “그림책은 일상의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예술이란 말이 주는 거리감이 있다.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림책은 정말 가까이에 있다. 쉽게 접할 수 있고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고 그다지 비싸지도 않다. 아이와 함께 볼 수도 있고 자기만을 위한 휴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특히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예술이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런 점에서 그림책이 아주 좋다”며 “그림책이 아이들 곁에 널브러져 있으면 좋겠다. 그 책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면 점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지는 이번에 ‘여름이 온다’를 출간하면서 독자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하드커버 표지 위에 더스트자켓(겉싸개)을 만들어 씌운 것이다. 더스트자켓을 책에서 분리해 펼치면 포스터 크기의 그림이 된다. 책에 사용된 이미지들을 새로 조합해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 작가의 사인까지 넣었다.

그는 “이번 책의 판형이 꽤 크긴 하지만 일반 회화 작품에 비하면 작다. 독자들에게 큰 그림으로 작품을 보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면서 “더스트자켓을 액자로 만들어 걸었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 말했다. 이어 “대중들이 그림책을 일상의 예술로 누리는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며 “내 책도 그런 과정에서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수지의 그림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든다. 아이, 놀이, 물 등을 주요한 소재로 사용한다. 원피스 한 장 걸치고 신나게 뛰어노는 씩씩한 어린 소녀는 이수지 작품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는 “어린이책이라서 여자아이를 자주 그리는 게 아니라 아이가 주인공인 그림을 내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의 에너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그게 좋다. 아이가 가장 아이다울 때는 놀 때인데 노는 순간 아이가 보여주는 즐거움과 자유로움, 에너지를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파도나 물놀이, 빗방울 등을 파란색으로 그리면 그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너무 좋다. 그리면서 나도 행복해진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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