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지금 한국사회를 말해주는 영화들

천지우 2021. 9. 1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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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판도라’ 영화 한 편을 보고 탈원전을 주장하더니, 홍준표 후보는 드라마 ‘D.P.’를 보고 모병제를 주장한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국민의힘 대선주자 유승민 전 의원이 최근 페이스북에서 홍준표 의원의 모병제 공약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고작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보고 중대한 정치적 결심을 한다는 게 말도 안 되고, 그렇게 나온 결심은 엉성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문 대통령의 탈원전과 홍 의원의 모병제 공약이 정말로 깊은 공부와 고민 끝에 나온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비판이다. 다만 대중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이 느껴져 약간 섭섭하다. 모두가 가볍게 즐기는 도락 거리여서 하찮아 보이는 것일 테지만, 누구나 쉽게 누린다는 점 때문에 무시 못할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선 지금 이곳에 대한 즉물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한 젊은 유권자에게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라는 영화의 광고 카피(‘누가 이기든 미래는 없다!’)가 생각난다고 하더라.”

최근 정치 대안운동 모임을 결성한 금태섭 전 의원이 라디오에서 한 말이다. 거대 양당의 대선주자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절묘한 상황 묘사가 있을까 싶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2004)는 별개의 두 영화 속 악역인 외계 괴물 캐릭터를 가져와 싸움을 붙인 영화다. 기존 오리지널 영화의 품격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러니까 젊은 유권자의 말은 이번 대선이 ‘막상막하로 나쁘고 흉측한 두 괴물이 펼치는 수준 낮은 싸움’이며, 그래서 누가 이기든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시시한 영화 제목 하나로 이번 대선의 성격을 설명한, 촌철살인의 풍자라 할 수 있겠다.

큰 화제를 모으는 영화는 담고 있는 메시지나 대중의 반응에서 당대의 지배적 인식, 또는 시대정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올해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모가디슈’를 보자.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때 남북 외교관들이 함께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낯선 이국땅의 내전은 극한 상황임을 나타내는 배경일 뿐이고, 핵심은 그 속에서 남북이 협력하는 이야기다. 뜨거운 동포애가 마구 분출할 것 같지만 영화는 그걸 상당히 자제해서 호평을 받았다. 눈물 짜내기에 주력하지 않은 게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이곳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감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지난 6월 국민일보의 MZ세대 여론조사에서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31.0%가 ‘상관없는 남과 같은 국가’라고 답했고, ‘한민족 동포’라는 답변은 17.1%에 그쳤다. 북한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마음이 이렇게 싸늘하니, 북한을 다루되 동포애를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는 영화에 호응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모가디슈’를 만든 류승완 감독의 전작 ‘군함도’(2017)는 현 정권의 주요 이슈에 포함되는 ‘반일’과 ‘친일’을 다루고 있어 되짚어볼 만하다. 영화는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 광복군, 일제 부역자 등 수많은 인물의 사연을 다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산만했지만 개봉 당시 영화에 대한 반응이 흥미로웠다. “너의 반민족 행위를 조선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대사가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정도로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영화의 기둥인데, 이 점 때문에 감독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나쁘게 그려져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작진이 좀 앞서나갔던 것 같다. 개봉 이후 이 정권 내내 친일파·토착왜구 타령이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군함도로 징용돼 착취당하던 조선인들이 집단 탈주에 성공한다는 허구의 설정 때문에 ‘국뽕’이라는 지적도 나왔지만, 국뽕이라 할 정도로 결말이 통쾌하진 않다. 그래서 흥행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을 것이다.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을 보면 ‘우리는 일본을 추월한 명실상부 선진국이니 국뽕에 취해도 된다’는 자부심이 현재 이 나라의 지배적 정조인 듯하다. 윤 원내대표가 “문재인정부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정부로, 해방 이후 75년 만에 일본을 넘어선 정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자 민주당 의원들의 박수가 터졌다. 함께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난 손발이 오그라드는 쪽이다. 뭐가 그렇게 뿌듯한가 싶다.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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