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칼럼] 9·11 20주년과 아프간..두려움과 흥분을 넘어

2021. 9. 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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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힘의 공백은 순식간에 혼란과 폭력으로 메꿔졌다. 우리가 지켜본 대로 미군이 떠나는 아프간 카불에서 테러, 탈주, 혼란, 공포가 한꺼번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지난달 카불 공항의 아비규환의 뿌리는 20년 전의 끔찍했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은 초가을의 아름다움을 한껏 즐기던 세계경제의 수도였다. 가을 하늘만큼이나 미국인들의 자부심도 높이 솟아 있었다. 사회주의 소련은 무너졌고 미래의 경쟁자 중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이었다. 미국은 세상 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듯 보였다. 아침 8시 45분 알카에다 행동대원들이 보잉 767 여객기로 세계무역센터(WTC) 북쪽 타워를 들이받기 전까지는.

「 혼란스런 철군이 두려움, 흥분 불러
하지만 한미동맹은 결속 강화 중
양국 대통령 5월에 동맹강화 합의
철군은 미국의 새 균형전략 시작

104층짜리 WTC 빌딩이 두 시간 만에 완전히 녹아내리는 동안, 미국의 자부심은 불같은 분노로 바뀌었다. 그해 초에 취임한 W 부시 대통령은 경험보다는 경박함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었다. 며칠 후 방송에 나타난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국가 간의 정규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쟁이었다. 곧 이어 알 카에다가 숨어 있다는 중앙아시아의 아름답고 척박한 땅,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미군이 탈레반 정권을 단숨에 무너뜨릴 때만 해도, 이 전쟁이 20년짜리 수렁인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지루한 전투와 지지부진한 국가건설 사업이 계속되는 동안 미군과 민간용역 전사자는 60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아프간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들 20년 전쟁에 지쳐갈 무렵, 허풍장이 트럼프는 탈레반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평화협정 한 장을 덜컥 사인해놓고는 퇴장해버렸다.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부통령으로 아프간 전쟁을 다뤄봤던 바이든 대통령도 철군 날짜를 9월 11일로 못박을 때, 정치적 도박이라는 짐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과 참모들은 미국 중산층의 회복과(아프간 군비의 절약!) 외교안보 정책을 연계한다는 새로운 외교 교리에 대한 믿음으로 기울었다. 미국 유권자들의 철군 지지 여론(50%) 역시 중대 결정의 불안감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효율적이고 평화적인 후퇴란 것이 역사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카불 공항의 참상을 지켜보며 세계인들의 감정은 종종 두려움과 흥분으로 갈라졌다. ①미국의 동맹국들은 미국을 믿을 수 있는가? 미국은 언제든 일방적으로 떠날 수도 있는 동맹인가라는 의심과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었다. ②다른 한편 온 세계 일에 참견하던 미국이 이제 자기 앞가림에 바쁘고 바야흐로 미국의 시대는 기울고 있다는 반미(反美)의 흥분 또한 적지 않게 퍼져가고 있다.

두려움과 흥분은 늘 우리 곁을 맴도는 감정이지만, 국익과 안보를 챙겨주지는 않는다. 먼저 두려움의 감정부터 돌아보자. 가장 손쉬운 길은 지난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발표한 정상회담의 공동성명문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이 공동성명은 서울과 베이징, 평양, 도쿄의 전략가들을 깜짝 놀라게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공동성명에 그려진 한국은 미국의 신안보, 경제전략의 핵심 파트너다. 예컨대 문 대통령의 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아세안 지역에서 만난다. 두 대통령은 아세안 지역에서 경제발전, 에너지 안보, 수자원 관리 등등의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한미 동맹은 한반도를 넘어 수천㎞ 밖, 동남아까지 확장되고 있다.

또한 공동성명은 6G 네트워크, 친환경 EV 배터리, 전략물자, 바이오테크, 인공지능, 양자(Quantum) 기술 등 첨단 분야에서 양국의 긴밀한 협력을 약속하고 있다. 첨단기술 분야의 선도자 격인 미국은 반도체, 모빌리티, 화학 등의 제조업 강국인 한국과 4차 산업혁명 동맹을 확고하게 다지려는 중이다.

한미 정상의 공동성명은 화려한 외교문서로 끝나지는 않는다. 공동성명의 문구 하나 하나를 갖고 씨름하던 양국 관료들은 이제 합의사항들을 정책으로 구체화하면서 자신들의 정책 영역을 넓혀간다. 양국 기업들은 서로의 이익이 맞닿는 지점에서 밸류 체인을 더욱 강하게 결박해 가는 중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리스크는 미국이 어느 날 덜컥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미 결속 강화에 따르는 주변 관리가 우리의 리스크이다.

다른 한편, 미국 패권이 못마땅한 반미주의자들이 혼란스런 미군 철수를 보며 느끼는 흥분 또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아프간 철군으로 체면을 구겼지만, 미국의 기술력, 압도적인 군사력은 달라진 바가 없다. W 부시 시절처럼 넘쳐나는 돈과 허영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좌충우돌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쇠퇴를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처럼 미국 내부의 양극화 해소, 중산층 회복에 힘을 집중한다면, 미·중 경쟁 시대는 꽤나 오래 지속될 것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게 될 미·중 시대에 두려움이나 흥분이 우리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감정의 절제, 큰 흐름의 주시를 통해서만 미·중 경쟁의 시대를 헤쳐갈 수 있지 않을까.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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