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맹탕
“애가 탄다. 탕제를 달여서 대령했는가?” 스물다섯 살 손자가 할아버지의 병색을 살피다 몸이 달았다. 가래 끓는 소리가 나고, 눈꺼풀만 겨우 움직일 정도가 되고 손발이 차갑게 식기 시작하자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45년 전인 1776년 3월 3일 새벽녘의 일이다.
죽음의 사신을 마주하고 누운 이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 당시 나이 83세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손자는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영조의 병이 깊어지자, 어의에게 탕제를 대령하게 했는데, 어의가 가져온 것이 바로 백비탕(白沸湯)이었다. 그 어떤 것도 넣지 않고 끓인 물. 바로 맹탕이었다. 정조는 이 백비탕을 숟가락으로 떠서 영조의 입에 넣어줬지만, 애석하게도 영조는 어렵사리 삼켰던 탕을 가래 기침과 함께 모두 토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생기가 점차 사라지는 영조의 마지막을 이렇듯 소상히 적었는데, 실록 중 등장하는 유일한 백비탕 기록이기도 하다.
백비탕, 다른 말로 백탕이라고도 하는 이 맹탕을 떠올리게 한 건 한 정치인의 아리송한 기자회견 탓이다. 대선 후보로 나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측근에게서 지난해 여권 인사에 대한 고발장을 넘겨받았다는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이 정계를 뒤흔들고 있는데,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8일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대선판을 흔들 위력을 보이는 이 의혹을 밝힐 핵심 인물이지만,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니다. 고발장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인할 방법도 없다”는 허망한 말을 남기면서 ‘맹탕 회견’이란 오명을 얻었다. 기자회견이 진실을 밝힐 것으로 기대했지만 김 의원의 발언으로 오리무중 의혹은 외려 갑절로 불어났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맹탕이 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적잖이 보았다. 입시 전쟁으로 사교육에 쏟는 부모들의 돈이 늘어나자 “사교육을 잡겠다”고 내놨던 맹탕 사교육 경감 대책(2009년)이 그랬고,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에 검찰이 나섰던 재수사가 맹탕이 됐을 때(2012년)도 그랬다.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청문회(2016년)도 하나 마나 한 말 잔치로만 끝나면서 불황을 맞이했던 기업들의 회생길은 더 멀어졌다. 책임 있는 분들의 책임 없는 맹탕 잔치, “이제 그만 하십시다.”
김현예 P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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