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손민호 2021. 9. 10. 00: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자우길 ⑥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 구간 구재봉 활공장에서 촬영한 경남 하동 악양들판. 섬진강 왼쪽이 전남 광양이고 오른쪽이 악양들판이다. 악양들판 뒤 형제봉 너머에 화개장터가 있다. 내내 비를 맞고 걸었는데, 구재봉에 오르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렸다.
지리산에 다시 들었다. 이번에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실상사에 들러 지리산에 길을 내기 전 이야기도 들었다. “지리산둘레길은 순례길”이라던 도법 스님의 일갈이 아직도 쟁쟁히 울린다. 지리산을 걷는 건 여느 길을 걷는 것과 분명 다른 일이다. 여행이라기보단 수행에 가까운 경험이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지리산둘레길을 연 사람들. 왼쪽부터 이원규 시인, 이상윤 ㈔숲길 이사장, 도법 스님, 박남준 시인.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에서 지리산길이 시작됐어. 지리산 댐 반대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지리산 살리기 운동으로 전환한 결과가 지리산둘레길이야. 현대인이 성찰의 삶을 회복하려면 온몸을 써서 자연을 걸어야 하는데, 지리산에도 막상 사람이 걸을 길이 없는 거야. 1500리 탁발순례를 하는데 큰 트럭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걸었어. 안 되겠다 싶어 지리산에 사람이 걷는 길을 만들자고 정부에 건의했지.”

도법 스님이 옛 일화를 소개했다. 스님 말마따나 탁발순례 3년 뒤인 2007년 지리산둘레길을 조성·관리하는 ㈔숲길이 꾸려졌다. 초대 이사장이 도법 스님이었다. 2008년엔 전북 남원 주천에서 경남 함양을 거쳐 산청 초입에 이르는 71km 구간을 개통했고, 2012년 20개 코스 274㎞의 지리산둘레길이 완성됐다. 현재는 지선이 추가돼 21개 코스 295㎞에 이른다.

장승 모양의 지리산둘레길 이정표.

지리산둘레길의 기원이 탁발순례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스님이 밥을 빌며 순례하는 수행이 탁발순례다. 밥을 빌려면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지리산둘레길의 가장 큰 특징이 지리산 자락 마을을 꼬박꼬박 방문하는 데 있다. 3개 광역단체, 5개 시·군, 20개 읍·면에 걸친 마을 110여 개를 지리산둘레길이 들어갔다 나온다.

마을을 잇는 길이어서 지리산둘레길은 코스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는다. 하여 지리산둘레길엔 1코스가 없다. 길이 시작하는 1코스가 없으니 길이 끝나는 종점도 없다. 지리산둘레길에는 대신 ‘인월-금계’처럼 마을을 앞세운 코스가 있다. 탐방객으로선 영 불편하다. 이름만 봐서는 이 코스가 남원에 있는 것인지, 하동에 있는 것인지도 막막하다.

위태-하동호 구간의 대숲길.

하나 지리산둘레길은 개의치 않는다. 지리산을 걷는데 시작점과 종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레 묻는다. 코스를 거꾸로 걸으면 어떻고, 설령 길을 헷갈려 옆 마을을 걸으면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바깥세상에선 당연한 일이 지리산에 들면 도무지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길도 마찬가지다.

기네스 세계기록

전북 남원 실상사. 실상사에서 생명평화탁발순례 논의가 시작됐다.

지리산둘레길은 여러모로 불친절한 길이다. 무엇보다 길은 지리산 자락의 숱한 명소를 외면한다. 화엄사도 사하촌 앞에서 방향을 틀고, 쌍계사 쪽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 심지어 탁발순례를 결의했던 실상사도 코스에서 빠졌다. 최참판댁이나 스카이워크 같은 관광지는 깨끗이 무시한다. 솔직히 길도 좋지 않다. 요즘엔 지리산 자락의 마을도 어지간하면 포장도로가 많기 때문이다.

심각한 오해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노고단이나 천왕봉에 올라 지리산 능선을 내다볼 수 있겠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지리산둘레길은 산림청으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다. 반면에 지리산 국립공원은 국립공원공단이 관리한다. 길의 성격이나 코스는 의외로 예산이 규정한다.

삼화실-대축 구간의 문암송.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도 서 있는 모습에 위엄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91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은 2019년 세계 기네스협회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긴 야생화 트레일’ 인증을 받았다. 호들갑을 떨어도 될 만한 뉴스였지만, 지리산둘레길은 변변한 보도자료도 뿌리지 않았다. 굳이 소란피울 필요를 못 느꼈단다.

“순례길 이름을 단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하고 구마노 고도가 있어. 하나는 기독교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길이야. 지리산둘레길은 범종교와 시민단체가 함께해서 만든 길이야. 관(官)도 역할을 했고. 지리산둘레길은 종교와 민관을 아우르는 순례길이야. 다른 나라 순례길보다 뛰어난 세계적인 순례길이야.”

기네스 세계기록 인증서.

도법 스님 말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고 탁발승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길을 걷는 마음이 여느 트레일과 다른 건 누구나 인정한다. 아마도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몸 안에 한 그루 푸른 나무를 숨 쉬게 하는 일(박남준 ‘지리산둘레길’ 부분)’일지 모른다. 아무리 불편하고 허술해도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리산이어서다. 지리산에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다.

■ 길 정보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은 불편하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코스 지도도 틀린 정보가 많으며, 제주올레처럼 이정표가 꼼꼼히 있는 것도 아니다. 길 잃을 염려는 있어도 큰 사고가 날 걱정은 없다. 마을을 잇는 길이어서 마을만 찾아가면 된다. 지리산둘레길 군데군데 배치된 7개 안내소와 센터에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