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1) 1g 100만원..차 한 번 우리는 데 300만원
2016년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보이차 7편이 14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가격이다. 이 차를 낙찰받은 사람이 2년 후 홍콩 경매에 다시 출품해서 20억원에 낙찰됐다. 이쯤 되면 머리가 어지럽다. 차 7편의 무게는 약 2㎏이다. 대체 어떤 차가 1g에 100만원이나 한단 말인가? (3g 정도 덜어내서 한 번 우려 마시려면 자그마치 300만원이나 든다.)
홍차 중 제일 비싼 금준미가 1g에 7000원 정도 한다. 금준미가 비싼 것은 아주 어린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금준미 1g을 만드는 데 싹 160개가 필요하다. 원래 차는 어릴 때 딸수록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나 저 보이차는 어린싹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매우 거친 잎으로 만들었고 줄기도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도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에 거래된 것은 오래됐기 때문이다. 경매 회사는 100년 가까이 된 차라고 소개했다.
오래되면 가격이 비싸지는 보이차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보이차는 처음에는 쓰고 떫어서 마시기 힘든데,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마시기 편하게 변화한다. 그래서 오래될수록 찻값이 비싸진다. ‘올빈(오래된 빈티지)’일수록 비싸지는 보르도 와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보이차는 윈난성에서 생산된다. 20억원에 낙찰된 차도 윈난성에서 만들어졌다. 홍콩에 팔려 가 지난 100년간 홍콩에서 보관됐다. 당시 윈난 상인들이 홍콩까지 간 것은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 보이차는 중국에서 꽤 인기가 많아 상인들은 판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보이차는 일부는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판매됐고 일부는 티베트로 팔려 나갔다. 그런데 1850년대에 윈난성에서 봉기가 일어나면서 베이징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봉기는 16년이나 지속됐다. 다급해진 상인들이 베트남을 지나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갔다. 윈난성은 중국 최남단, 아주 깊은 내륙 지역이다.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가서 큰 배로 갈아타고 홍콩까지 갈 생각을 했을까? 애초 이 길을 개척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잊혀졌지만 덕분에 홍콩까지 간 보이차는 다시 뱃길로 상하이, 베이징으로 무사히 팔려 나갈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 홍콩이 중계무역지로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홍콩 자체가 보이차의 큰 시장이 됐다. 홍콩 사람들은 보이차를 많이 소비했다. 저렴했기 때문이다. 땀을 많이 흘리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보이차를 마시며 갈증과 더위를 달랬고 식당 주인은 손님에게 무료로 보이차를 제공했다. 날마다 보이차를 마시고 성장한 홍콩 사람들은 보이차를 ‘영혼의 차’로 생각했다.
홍콩 사람들이 순하고 부드러운 차를 선호하는 반면 윈난에서 금방 도착한 보이차는 너무 쓰고 떫었다. 쓰고 떫은맛을 없애기 위해 보통은 차를 창고에 몇 년씩 보관했다가 시중에 공급했다. 보관 기간은 대개 10년 정도였다. 10년이나 저장해야 판매할 수 있는 차를 어떤 상인이 취급했을까 싶지만, 보이차 매입 단가가 워낙 저렴하고 대량으로 소비됐기 때문에 그런 판매 방식이 가능했다. (그래도 100년씩 된 차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매우 희박하게 등장하는 100년 된 보이차는 경매에서 비싼 가격에 낙찰된다. 그래서 보이차를 ‘마실 수 있는 골동품’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100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부터 홍콩 상인들은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이들은 10년씩 시간을 끌지 않으면서도 쓰고 떫은맛을 없앨 방법을 연구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최종적으로 찾은 방법은 윈난에서 온 차를 바닥에 쌓은 후에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덥고 습한 홍콩 날씨에 물까지 뿌리면 차에 곰팡이가 피었다. ‘차에 곰팡이가 피면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곰팡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이 먹는 된장도 사실은 곰팡이를 피워서 만든 것이지 않은가. 곰팡이는 차의 성질을 크게 바꿨고 그 결과 차에서 쓰고 떫은맛이 없어졌다. 곰팡이를 이용한 발효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곰팡이로 발효차를 만드는 이 기술은 지금 홍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홍콩 땅값이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면서 금싸라기 땅에서 보이차를 익혀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판단한 상인들이 홍콩에 인접한 광둥으로 기술을 이전했다. 중국이 아직 계획경제를 실시하던 시절이라 홍콩 발효차 기술은 국영기업 광둥성다업공사로 이전됐다. 광둥성다업공사는 이전받은 기술로 보이차를 발효시켜 다시 홍콩에 공급했다. 그때부터 광둥성이 보이차의 중요한 생산지가 됐다.
원래 보이차를 생산했던 윈난은 그사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중국 정부는 윈난성에 차를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다. 보이차를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은 광둥성에 있었다. 윈난은 정부 지시에 따라 원료차를 생산해 광둥성에 보냈고, 광둥성에서 그 원료로 차를 발효·가공해 홍콩으로 보냈다. 홍콩은 이 차를 받아 일부는 자체적으로 소비하고 일부는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에게 공급했다.
윈난에서 만든 원료가 광둥으로 가서 발효차로 가공되고 다시 홍콩으로 가고 동남아로 건너갔다. 노선이 상당히 복잡한데 보이차를 발효하는 기술을 광둥에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윈난에서 원료를 생산하고 발효까지 한다면 훨씬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중국 정부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1973년에 앞으로는 차 원료를 광둥으로 보내지 말고 윈난에서 바로 발효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20년 동안 원료차만 만들던 윈난성다업공사는 갑자기 발효차를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됐다. 천천히 연구할 시간을 준 것도 아니었다. 당장 발효차를 만들어서 홍콩으로 보내라고 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는 저리 가라는 수준이다.) 윈난성다업공사는 젊은 기술자들로 전담반을 꾸려 홍콩과 광둥으로 보냈다. 최소한 몇 달은 머물면서 연수를 받아야 정상이지만, 워낙 사정이 급박해 이들은 며칠 동안 둘러보고 바로 돌아갔다.
충분한 기술이 없으니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차에 물을 뿌려도 곰팡이가 제대로 피지 않는 것이 문제였는데 덥고 습한 광둥에 비해 윈난은 날씨가 너무 쾌적한 것이 원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3년에 발효된 보이차를 만들어냈다. 다만 당초 정부에서 원했던 250t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12.5t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이때부터 윈난은 명실상부 보이차 생산지가 됐다. 40년간 발효 기술을 끊임없이 개선한 결과 지금은 누구나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좋은 차를 만들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5호 (2021.09.08~2021.09.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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