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프런티어]"출산·육아로 경력정체..그래도 포기하진 말자고요"

김은별 2021. 9. 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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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연 한국투자신탁운용 FI운용본부장이 지난달 31일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신탁운용에서 인터뷰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2021 아시아여성리더스포럼 10기 멘토

이미연 한국투자신탁운용 픽스드인컴 운용 본부장

국내 1세대 여성 채권매니저, 업계 최초의 여성 채권운용 부문 임원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30~40대 여성들이 조직의 허리일 때 전문가적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한데, 아쉬운 것은 이 시기가 출산·육아 부담이 커지는 시기라는 겁니다. 특히 고학력 금융권 여성들은 출산·육아로 본인의 커리어가 발전하지 못하는 기간이 생기고, 긍정적 평가를 못 받는 사실을 참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 그 기간이 굉장히 힘든데 포기하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국내 1세대 여성 채권 매니저이자 업계 최초의 여성 채권운용 부문 임원, 일을 시작한 지 26년째를 맞은 이미연 한국투자신탁운용 픽스드인컴 운용본부장이 여성들에게 던진 메시지다. 그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본부장은 "훌륭한 여성 선배들이 중도에 떠났기 때문에 현재 여성 리더들이 많이 없는 것"이라며 "저도 위기 때마다 유혹을 많이 느끼지만, 많은 후배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면 정신이 들고 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새벽 4시반, 출근 전 회계학원으로

현재는 순자산 기준 23조원을 운용하는, 채권업계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이지만 이 본부장의 시작은 금융과 동떨어져 있었다. 1996년 이 소장은 네덜란드 증권사인 ABN암로에 리서치어시스턴트(RA)로 입사했다. 사회복지학 전공이지만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금융권에 발을 들였다. 신입 시절 현금등가물(Cash Equivalent)을 현금과 구분하지 못한 큰 실수를 한 뒤 ‘이러면 안 되겠다’고 각성했다. 아침 6시 광화문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인 새벽 4시30분 회계학원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회계학·재무 등 대학교 때 배우지 못했던 대부분의 과목을 개인적으로 이수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SC제일은행 계열 운용사에선 주식 RA로 입사했지만 채권부문까지 발을 넓혔고, 채권펀드 운용도 맡았다. 이 본부장은 "주식 업무에서 채권 애널리스트, 펀드 운용까지 계속 업무가 추가된 사례"라며 "신입 시절엔 여러 분야로 본인의 일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고, 충분히 탐색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그는 누군가 이끌어주길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2001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현대건설 전환사채(CB)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왜 내가 사는 채권과 회사를 실제로 분석하지 않을까’ 하는 근본적 의문이 들었다. 국내에서 크레디트 분석 모델을 처음으로 만들게 된 계기였다. 당시만 해도 회사채에 투자할 땐 신용평가 등급만 참고했을 뿐 자체 분석을 하지 않았다. 이 본부장은 "외국계(템플턴자산운용)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를 무작정 찾아가 크레디트 분석을 알려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국내 14명 정도에 불과했던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와 ‘크레디트 피플’이란 모임도 만들었다. 이 모임은 현재 업계에선 누구나 아는 대형 커뮤니티가 됐다.

이미연 한국투자신탁운용 FI운용본부장이 31일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신탁운용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女, 육아·출산으로 과도한 위축"

이 본부장은 금융·채권업계에 여성들이 적은 이유로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업계 특성을 꼽았다. 채권업계는 장외거래(OTC)가 중요한 만큼 네트워크에 껴야 하는데, 남성 중심으로 구축돼 있어 여성이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출산·육아휴직 후 복귀하면 따라잡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시장 변화를 파악하기도 버거운데 승진이 누락되거나 낮은 연봉인상률이 기록된 통지서를 받아들 때면 박탈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본부장은 "저도 항상 그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과도하게 이의를 제기한 적도 많아 싸움닭, 혹은 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대신 맡겨진 일은 책임감 있게 완수하고 목표 이상을 성취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독하게 살아왔지만 막상 지금 돌아보니 ‘여성들이 꼭 천장을 뚫어야만 회사를 다닐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남성은 낙오된다고 해서 일 자체를 그만두지 않는데 여성은 왜 그만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문성과 경험이 있고, 포기하지만 않고 시기를 넘기면 다른 여성 동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며 "상황에 따라 일과 개인의 밸런스를 조절해 가며 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본부장이 이끄는 본부는 여성 비율이 50%로, 업계와 사내에서도 압도적인 여성 비율이다. 그는 "결혼, 육아 등 힘든 시절엔 적절히 업무 조정을 해 주되 전문성과 네트워크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채찍질도 많이 하는 편"이라며 "6대 4 비율로 가정에 좀 더 힘을 쏟은 뒤 삶이 안정된다면 만족하지 않고 도전하길 권한다"고 덧붙였다.

"회사생활, 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즐겨라"

여성이라면 자주 듣는 ‘네트워킹 부족’ ‘뻣뻣하다’는 평에 대해서도 아쉽다고 지적했다. 후배들에게도 ‘모든 일을 일로만 받아들이진 말고 즐기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는 이유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특히 이런 부분은 리더에 올랐을 때 더 중요하다고 했다. 2018년 본부장직에 오른 그는 벌써 4년째 임원을 맡고 있다. 이 본부장은 "(리더는) 이미 전문성으론 증명된 사람인 만큼 여유를 갖고 주변을 살피면 좋겠다"며 "여성 리더들이 항상 도전받는 과제가 시야가 좁다거나 정무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의 다음 목표는 성장이 정체되고 위기가 닥쳐도 튼튼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진 ‘내 업무성과’ ‘내 팀의 성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면 리더는 결국 본인이 남긴 ‘유산(Legacy·레거시)’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깨닫고 세운 목표다. 최근 리더십 과정을 통해 만난 리더십 컨설팅 전문가 조미진 FCLG 대표의 "리더는 사람의 성장을 돕는 사람"이라는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이 본부장은 "지금까지 수탁고, 성과 측면에서 구성원들이 잘 따라준 덕분에 본부도 큰 성과를 보였는데 이제는 시장금리가 오르고 있어 정체되고 리스크가 커질 수 있는 시기"라며 "성과 뒤에 따르는 정체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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