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박용진 의원님, 86세대 좇으며 뭔 세대교체 타령입니까 [박가분이 저격한다]
18세기 독일에서 실존했던 인물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의 소설『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을 통해 세간에 허풍쟁이로 널리 알려진 뮌히하우젠 남작의 유명한 일화를 먼저 얘기해볼까 합니다. 하루는 그가 말을 타고 가던 중 늪에 자빠졌습니다. 주위에 붙잡을 것이 없어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던 남작은 급한 김에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려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물리법칙을 간단히 무시하며 수많은 이과생 뒷목을 잡게 한 남작의 허풍은 다른 각도로 보면 요즘 유행하는 ‘86세대 비판’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86세대를 비판하는 이들 역시 결국 86세대의 세계관과 자장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례지만,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님을 비롯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86세대와의 ‘구별 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 취임과 사퇴가 만들어낸 이른바 '조국 대전’ 이후 확실히 86세대는 동네북이 됐습니다. 86세대 비판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적 대유행이 됐습니다.
대권 도전에 나선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는 그 자신이 86세대이면서도 “세대 간 공정을 얘기하지 않는 공정은 가짜 공정”이라며 “공정 자격 없는 586 기득권을 몰아내자”고 주장했죠. 여권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박용진 의원님도 70년대생임을 내세워 “먹고 사는 문제에 무관심한 86세대는 기득권”이라며 세대교체를 말했습니다. 최근 민주당 경선 국면에서도 “세대교체로 한국사회의 큰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죠. 진중권을 위시한 논객들 역시 조국 흑서인『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86세대를 정부 여당을 망친 주범으로 지목했습니다. 오죽하면 86세대의 일원이자 약간 선배 격인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본인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86세대에게 위로를 전하기에 이르렀을까요.
하지만 저는 뭔가 이상합니다. 정말 86세대를 몰아내면 우리 정치가 나아질까요? 앞서 언급한 박용진 의원님을 포함해 민주당 박주민 의원님 등 70년대생 X세대 정치인분들은 중요한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합리적·실용적 포지션을 취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모두 세대교체의 당위성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정말 86세대만 물러나면 모든 게 좋아질까요, 아니 X세대 정치인들이 과연 86세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86세대와 똑 닮은 위선적 X세대 정치인
우선 지금 유행하는 세대교체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세대 내 불평등을 철저히 외면한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의 일반대학, 교육대학, 전문대학을 아우른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10~20%대에 불과했고, 이미 여기서부터 명문대 학번으로 뭉친 86세대는 자신의 또래집단과 다른 입장에 섰습니다. 이들 이외의 평범한 86세대, 아니 지금 50대의 상당수는 운 좋은 경우 실직의 불안에 시달리며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운이 나쁜 경우 이른 퇴직 후 비자발적인 자영업과 임시직을 전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65세 이하 전 연령집단 중에서 (86세대와 나이가 겹치는) 51~65세의 빈곤율이 가장 높습니다. 50대의 자살률(2019년 기준) 또한 60대 다음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결국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86세대란 한 세대 내의 기득권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묻습니다.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세운 박 의원님을 비롯한 X세대 정치인들은 86세대와 무엇이 다른지요. 여러분들은 상당수 명문대 출신이며, 법조계 출신이거나 아니면 학생운동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학생운동의 몰락기 이후에도 꿋꿋이 사회운동에 발을 담갔던 터라 그런지 이분들의 세계관은 86세대의 지사(志士)적 세계관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명문대를 나온 후 법조계나 시민운동단체를 통해 착실히 지위와 명망을 쌓아 올린 코스도 86세대와 대동소이하고요. 박 의원님의 세대 대표성은 86학번들의 그것만큼이나 희박합니다. 세대를 대표하기는커녕 86세대와 마찬가지로 세내 내 소수 기득권층이라는 얘기입니다. 박 의원님을 비롯해 여러 정치인이 말하는 세대교체가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까 걱정되는 이유입니다.
더욱 외람된 말씀이지만, 학생운동과 소수 관료집단이 더는 사회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보니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X세대 정치인들이 평범한 대중의 눈엔 86세대의 ‘하위 호환’ 혹은 ‘열화판’으로 비치는 게 아닐지요. 무엇보다 박 의원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 X세대 정치인분들의 사고방식 또한 86세대가 은연중 품고 있는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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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청년 문제는 외면
왜 그렇냐면, 박 의원님 언행을 가만히 보면 청년들의 관심이나 정서와 동떨어진 곳에서 변죽만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대교체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청년들을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미 청년들의 관심사에서 떠난 지난 조국 사태에 대한 입장정리는 뒤늦게 요구하면서 정작 청년 대중을 진짜로 분열시키고 있는 레디컬 페미니즘 문제와 이를 방조·후원한 정부 여당의 실책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당을 위시하여 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이 고질적으로 내비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기(Political Correctness)’ 관행, 그리고 이와 결부된 오만한 태도가 조국사태 한참 전부터 대중의 눈에 ‘위선적’으로 비쳤다는 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청년들을 오래전부터 괴롭힌 일자리 문제와 주거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과 비전을 내놓기보다는 이런저런 개혁이슈에 대한 손쉬운 딴지걸기로 일관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선명성인가요.
'묻지마 세대론'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기득권 세대교체를 기도하는 것에 불과한 86세대 비판이 보통사람들의 중요한 문제를 가리고 갈등만 가중한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게으른 세대교체론은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갈등을 증폭시키는 빌미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50대의 위기는 청년들의 불안과 직결됩니다. 안 그래도 사회적 안전망이 희박한 한국사회에서 경제의 허리인 중장년의 경제적 지위를 흔들어봤자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이들을 가상화폐 묻지마 투기판 같은 곳으로 내몰 뿐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86세대의 갈라치기만 배워
아울러 꼭 지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86세대가 남긴 이런저런 공적도 있겠지만 이와 별개로 한국사회에 남긴 나쁜 정치적 유산이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의 바람을 하나로 결집하기보다는 49 대 51의 소모적 싸움을 유도해 각자 진영의 이익을 얻는 정치구조를 고착화한 것입니다. 세대교체론을 내세우는 X세대 정치인분들도 이러한 정치적 유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청년들이 겪는 진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대를 관통하는 불평등, 빈곤, 사회경제적 불안, 복지 사각지대, 재정 건전성 같은 관료적 미신과의 전면전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이런 중요한 싸움은 정작 늘 뒷전으로 밀려나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소위 소장파라고 부르는 박 의원님과 동료 정치인들도 ‘협치’나 ‘의회민주주의’라는 말로 개혁의 교착상태를 미화하기 바쁜 것은 아닌지요. 보통사람의 삶을 중심에 두지 않는 정치인들이 86세대를 비판하는 게 그저 기성 권력을 상대로 한 무기력한 도발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86세대와의 차별화가 어설프고 한가한 중도파 흉내 내기가 아닌,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데서 시작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박가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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