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갑질' 소방관 극단 선택.."평가 빙자해 모욕 줘"

나경연 2021. 9. 6. 21:2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19상황실 발령 후 불의 개선하려다 '따돌림'
"정의 하나만 보고 살았다" 유서 남겨
민주노총 찾아갔지만 충분한 도움 받지 못해
지난 5일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이 작성한 유서. 소방을 사랑하는 공무원노조가 유족으로부터 받아 공개했다.


대전소방본부 소속 소방관이 극단적 선택을 한 가운데 직장 내 갑질이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하루 업무가 끝난 뒤 상사가 소방관들의 민원인 통화를 평가하는 ‘강평’ 시간에 상사가 모욕적 언사로 고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등 심리적으로 괴롭힘을 줬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6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소방관 A(46)씨는 전날 오전 11시쯤 집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A씨는 가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유서에는 “누가 뭐라 해도 정의 하나만 보고 살았다. 가족, 어머니 미안해요”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A씨는 직장 내 갑질로 인한 우울증으로 지난 6월부터 병가를 내고 휴직 중이었다. 그는 동부소방서에서 근무하다 지난 1월 30일 대전소방본부 119 종합상황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지난 3월 중순엔 대전소방본부 200여명을 대표하는 직장협의회 대표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A씨는 새롭게 근무하게 된 119 종합상황실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참지 못했다. 그는 119 종합상황실장(이하 실장)이 여러 직원을 법적 근거도 없이 괴롭힌다고 봤다. 이에 상황실 관련 개선사항을 준비해 소방본부장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장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장은 고인의 행동이 자신의 권위에 반하는 것이라 보고 A씨를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대했다.

동료들은 고인의 상사였던 실장이 유독 ‘강평’ 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강평이란 상황실 하루 업무가 끝난 뒤 상사가 소방관들의 통화 서비스를 평가하는 시간이다. 상황실에 걸려온 민원인 전화를 상대할 때 언성이 높아지진 않았는지, 악질 민원에 대처를 잘했는지 등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시간이다. 이때 실장이 후배들도 모두 보는 상황에서 고인에게 모멸감을 줬다는 것이다.

한 동료는 “강평은 상사가 부하에게 이런 건 잘했고 이런 건 못했다고 평가를 하는 것인데 유독 고인에게 지적질을 많이 했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다. 강평이란 적법한 제도로 고인을 불법적으로 괴롭힌 것이다. ‘너 이제 빨간펜으로 난도질당해봐’ 이런 것과 똑같다. 딴짓 말고 ‘민원 전화나 잘 받아’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주고 좋게 말할 것도 어조를 틀어 심하게 말하면서 가슴에 못 박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지난 5일 극단적 선택을 내린 소방관이 지난 5월 3일 작성한 고충서. 소방을 사랑하는 공무원노조가 유족으로부터 받아 공개했다.


지난 5일 극단적 선택을 내린 소방관이 지난 5월 11일 작성한 고충서. 소방을 사랑하는 공무원노조가 유족으로부터 받아 공개했다.


A씨가 지난 5월 3일 본부에 제출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고충서에도 당시 상황이 상세히 적혀있다. 고충서 앞부분에는 “20년 정도 근무한 고참 소방관이다. 사정을 얘기하면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숨쉬기가 힘들고 어지러워 글로 전하는 점 양해 바란다”고 적혀있다.

A씨는 고충서에 “(본부가) 코로나19 감염방지를 빙자해 365일 24시간 3교대 근무하는 직원들의 외부 식당 사용은 물론 시청 내 구내식당 사용도 금지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와서 먹기를 1년이 넘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그래서 사실을 조사한바 전국 시도 모두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상황실에서만 식사해야 하는 것이) 어떤 법이나 지침에도 없는 사안임을 확인하고 실장과 얘기해보려 했다”고 적었다.

이어 “그랬더니 실장이 야간근무 후 퇴근하려고 회의실에서 기다리는 직원 14명이 모인 곳에 저를 들어가게 유도 후 다른 직원들도 몇 명 불러 나를 인민재판 하듯 몰아붙였다. 실장에 충성하듯 나보다 하급자인 후배들이 따지듯 달려드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11일 작성한 고충서에는 “참 섭섭한 것은 맘 터놓고 얘기한 직원이 가해자에게 매수된 것 같다. 근무성적 잘 주고 승진 때 힘써주겠다면 공무원이면 누구나 그러리라고 보지만 참 섭섭하다. 직장 단톡방에서는 여전히 나를 조롱하고 있다. 직원들을 위해 본부장님께 인원 보강까지 건의했는데도. 직장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참 무섭다”고 적었다.

또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예전에 투신한 여직원, 서초구에 근무하는 친구가 전철 타고 한강 건널 때 그냥 강물을 바라보면 뛰어들고 싶다고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고도 언급했다.

A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찾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좌절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소방을 사랑하는 대전공무원 노동조합’ 박일권 위원장은 “고인이 민주노총에 갔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카르텔이 있어 벽을 느꼈을 것이다. 유족 측도 고인이 마지막으로 기댄 것이 민주노총이었는데 해방구를 찾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얘기했다. 당시 민주노총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가 생긴 지 2달밖에 되지 않아 소방관 개인의 아픈 모습을 다듬어줄 여력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대전소방본부가 감찰 관련 사항을 감추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고인이 수차례 고충을 넣었지만, 본부는 감찰을 나오는 등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갑질 관련 사항을 인지했음에도 눈을 감은 것”이라면서 “최대한 고인이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감찰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만약 고인이 직장 내 갑질을 신고했다면 이는 개인정보 사항이라 본인 말고는 공개되지 않는다. 본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