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무너진 건 백화점만이 아니었다 [60일 안에 서평쓰기 ]

안소민 2021. 9. 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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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책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읽고

[안소민 기자]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동아리 선후배들과 대학로 앞을 지나는데 한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게 쇼윈도에 있던 티브이 뉴스 속보를 보는 중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분홍색 건물 가운데 부분이 고약하게 썩은 이처럼 폭삭 꺼졌다. 백화점이랬다. 그것도 강남 한복판.

그 전 해에는 멀쩡해 보였던 한강의 다리(성수대교)가 무너진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경악하다 못해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나는 이 세상이 곧 망하겠다 싶었다. 이다음에는 무엇이 무너질까, 그런 끔찍한 생각을 아무 생각 없이 했다.

1995년 당시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뉴스가 우리 일상에서 시시각각 많이 노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침저녁 뉴스 혹은 신문으로 그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뉴스를 볼 때 잠깐 생각하고 잊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면 "너 그거 들었어? 백화점이 무너졌대"라고 가십거리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표지
ⓒ 푸른숲
 
그리고 26년이 흘렀다. 나는 최근 삼풍백화점 생존자, 산만언니가 쓴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읽었다. 내 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 산만언니는 나랑 동갑이다. 이 책은 지옥 같은 재난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그 후의 이야기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 그때 무너진 것은 백화점만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도 철저히 무너졌다.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의 심연

강남 한복판 으리으리하고 화려하던 부의 상징 백화점이 한순간에 무너질 줄 누가 알았으랴. 단 몇 걸음 차이로 생과 사를 오가야 했던 그 무시무시한 삶의 허망함을.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외로움과 허망함을.

내가 그 고통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들이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사실만 그저 알 뿐이다. 그 고통이 어떤 깊이, 어떤 색깔, 어떤 흐느낌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내가 지금껏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아도 알 수 없다. 고통이란 그런 것이다.

본인이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그만 좀 하라'거나 '그만 아파해라'라고 다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모르겠다며 방관해서는 더욱 안 되는 일이다.

산만언니는 사고 이후,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잘 지낸 듯했지만, 실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저 그게 나이가 들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줄 알았단다.

인생이라는 게, 마치 결론을 다 알아버린 뻔하고 시시한 추리소설책 같아서 무의미했다는 산만언니는 세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려 했고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의미를 생각하려 노력했다.

삶의 검은 안갯속에서 늘 서성이던 산만언니를 구해준 것은 보육원의 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자원봉사 차 들렀던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그녀는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일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살아남았으니 살아남은 값을 해야 한다

산만언니가 세상에 향해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는 '세월호'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향해 산만언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한다"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반향이 컸던 만큼 산만언니는 악성댓글과 루머 등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야 겨우 평정심을 찾았는데, 평화로워졌는데 다시 감정의 격류 속에 휘말리는 자신을 보며 한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산만언니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다시 짚을 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땅에 사회적 참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쓰리라 결심한다.

그녀에게는 고유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엄청난 재난에서 겨우 살아남아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생존자가 던진 엄준한 육성이었다.
 
"사회적 참사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비극은 그 일에 연관된 사람들 다수의 유기적인 공조로 발생한다. 사고가 생기려면 누군가는 침묵해야 하고, 누군가는 보고도 못 본 척 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미루어야 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방관해야 한다. 그래야 결국 일이 터진다. 그러니 이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내어 그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 - p.231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애당초 왜 이 책을 읽으려고 했던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왜 이 책을 펼쳤던 걸까. 나는 단순히 궁금했던 것 같다. 그 후의 삶이 어떠했는지, 한 재난 사건이 생존자에게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을 다 읽고 깨달았다. 우리는 단순히 궁금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더 적극 공감해야 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껏 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다. 살아남았으니 살아남은 값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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