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공 직전 불까지.. 명동성당, 그 고난의 역사를 아십니까 [서울 근대건축 톺아보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 <편집자말>
[이영천 기자]
[기사 수정 : 12월 8일 오후 4시 7분]
▲ 명동성당 이전 모습 1987년 6월. 그 뜨거웠던 명동성당의 이전 모습을 간직한 사진이다. 지금은 진입로 등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
ⓒ 서울역사박물관 |
성당은 그 앞뒤로도 오욕의 역사에 맞서 싸웠고, 소외된 아픔을 치유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비겁하고 어둑한 역사에 늘 빛이요 희망이었으며, 높이 솟은 종탑은 누구에게나 충만한 위안이었다. 성당은 만들어질 때부터 이 모든 고난을 예비해 두었던가?
▲ 명동성당 일원 가톨릭 회관 등이 새로 들어선 명동성당 경역이다. 이전에 비해 많이 변화한 모습이다. |
ⓒ 이영천 |
서로 다른 문화는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며, 상호 수용과정을 거쳐 변화하고 발전해 나간다. 과정에서 극단적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이는 곧잘 피를 부르는 참화로 번지기도 한다. 우리에겐 가톨릭이 그랬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피의 역사일 뿐이었다.
자생적 가톨릭의 탄생은 시대적 흐름이었다. 수표교 이벽과 명례방 김범우 집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생겨난다. '명례방공동체사건'의 시발점이다.
1785년 봄 집회에서 이승훈 등 참석자 10여 명이 체포된다. 형조는 유력 사대부를 처벌하는 데 부담을 느껴, 신분이 낮은 역관 출신 김범우만 단양으로 귀양 보낸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이듬해 조선 가톨릭 최초 순교자가 된다.
조미수교가 이뤄지자 교구는 전통에 따라 성당 터를 물색한다. 최초 순교자 김범우 집이 있던 곳이 교구 시야에 들어온다. 아울러 가까운 종현(鍾峴) 높은 언덕은 매우 훌륭한 입지 조건이기도 하다.
1883년부터 교구는 이곳 집과 땅을 김가밀로라는 신도 이름으로 은밀하게 사 모은다. 이곳은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 소유로, 그의 검소한 삶에 감동한 고종이 명례방 일대 부지와 60칸 집을 하사한 곳이다. 그렇게 사들인 집을 교회 서당으로 사용한다.
▲ 초기의 명동성당 초가집 등이 있는 초기 명동성당 주변이 이채롭다. 어디서든 보이는 높은 첨탑이 가져 온 변화가 어떤 것이었을까? |
ⓒ 명동대성당.or.kr |
블랑 주교는 코스트 신부에게 1890년까지 터를 완성하라 독려한다. 신자들은 비로소 지긋지긋한 박해와 탄압으로부터 벗어난 증거를 성당 건축에서 찾으려 한다. 부지 정지 작업에 적극 협력한다. 전국 곳곳에서 성금이 답지하기도 한다.
고종의 반대
▲ 명동성당 종탑 종탑은 십자가를 제외하고 46.7m 높이다. 하부의 주 현관 부, 그 위에 파이프오르간 및 시계실로 이뤄진 탑신(塔身)부, 종을 지지하는 종루(鐘樓)부, 그리고 상부의 뾰족탑 구성이다. |
ⓒ 이영천 |
그해 3월 정부가 땅을 맞바꿀 것을 제의하나, 블랑 주교가 거부한다. 그러자 4월 28일 금교령(禁敎令)을 내려 모든 서양종교에 대한 포교 활동을 금지시켜 버린다. 금교령으로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까지 선교에 제동이 걸린다. 이 때문에 성당 건축은 부득이하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 정확히 고종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고종은 궁궐보다 더 높은 언덕에 높다란 가톨릭교회 첨탑이 세워지는 것에 분개한다.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특히 집과 부지는 윤정현을 위해 고종이 직접 하사한 것이어서 분노가 더 컸는지도 모른다.
가톨릭도 만만치 않게 대응한다. 6월에 부임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토지소유권 억류 해제가 합법적 해결 방안임을 조선 정부에 촉구한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계속되는 난관과 축성
▲ 성당건립에 앞서 1890년 주교관이 먼저 지어진다. 사진 중앙 하단 'H'형 붉은 지붕이 당시 건립된 주교관으로, 현재는 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
ⓒ 서울역사박물관 |
1893년 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휩싸인다. 자재공급이 원활치 못해 공사가 중단되자, 그해 10월 홍콩 주재 파리외방전교회가 5만 프랑을 긴급하게 지원한다. 또한 높은 종탑건설 중 수차례 붕괴사고가 있어 설계를 변경, 종탑 높이를 낮추기로 결정한다. 벽돌 기둥도 당초보다 더 두껍게 쌓는다.
청일전쟁으로 중국 기술자들이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공사는 또다시 중단된다. 1895년 초 공사가 재개되나 3월 들어 개신교 신자들이 몰려와 공사를 방해하기도, 5월엔 일본인들이 공사장 조경수를 훔쳐 가기도 한다. 6월에서야 중국인 벽돌공들이 본격적으로 공사에 투입된다.
외부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자, 급하게 프와넬 신부가 공사를 이어간다. 1897년 2월엔 성당으로 진입하는 진입로 부지를 마련하는데, 법무대신 조병식이 나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 명동성당 후면부 제대가 있는 후면부의 앱스(Apse)와 성당 측면부가 명확한 사진이다. 전체적으로 선명한 윤곽이 돋보인다. |
ⓒ 서울역사박물관 |
1898년 5월 29일 3천여 신도가 모인 성대한 축성식이 열린다. 난관을 뚫고 6년 만의 완공이다. 6월 11일 종탑에 종이 올려 진다. 신도들의 모금과 자발적인 노동, 자재 헌납 등이 이뤄낸 결과다. 6만 불 건립 비용 보다 모든 것을 헌신한 신자들 노고가 더 크고 높아 보인다.
▲ 성당 전면부 명동성당은 지형과 좌향, 진입로 등의 제약으로 정북에서 서측으로 30.5°엇갈린 북북서 입구를 가졌다. |
ⓒ 이영천 |
성당은 지반에서 13m 언덕 위에 자리하여, 우뚝 솟은 첨탑을 축성 당시엔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길이 68.25m, 폭 29.0m, 본당 높이 23.43m, 종탑(십자가 제외)은 46.7m 높이다.
일반적인 고딕성당이 서쪽 출입구를 갖는 동-서 배치인 점과 다르게, 명동성당은 지형과 좌향, 진입로 등의 제약으로 정북에서 서측으로 30.5° 엇갈린 북북서 입구다. 따라서 성당의 배치는 남남동-북북서가 되었으며, 건축 면적 1412㎡에 연면적 2015.17㎡이다.
▲ 지하성당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 유해를 모신 지하성당이다. 색이 다른 벽돌로 뾰족아치와 입면을 구성하였다. |
ⓒ 이영천 |
평면은 고딕양식 삼랑식 라틴 십자가형이다. 장중한 석조 고딕양식 본류를 따르지 못한 점은 재정 문제로 보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벽돌로 고딕적 디테일을 최대한 추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20여 종에 달하는 적·회색 서로 다른 벽돌을 성당 내외 각 부분에 알맞게 적용시킨 전통적 고딕 공법을 추구한 것이 그 예다. 입면구성 중 주요 창과 개구부는 뾰족 아치이고, 아치창 맨 위는 판 격자에 가까운 모양이다.
내부 평면은 중앙부와 양측 복도 구성이고, 입면은 뼈대 궁륭천장이며 횡단 아치와 뾰족아치가 연속으로 이어진 공중회랑을 연출한다. 여기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과 무늬가 성당의 권위를 한껏 높이는 구조다.
▲ 성당 내부 내부 평면은 중앙부와 양측 복도 구성이고, 입면은 뼈대 궁륭천장이며 횡단 아치와 뾰족아치가 연속으로 이어진 공중회랑을 연출한다. |
ⓒ 이영천 |
성당으로 오르는 언덕은 늘 의연함과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높이 솟은 종탑 때문만은 아니다. 뒤틀리고 비뚤어진 역사에, 성당이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 종소리 마냥 묵직하게 내리 누르기 때문이다.
87년 유월, 위기의 순간을 막아선 수녀님들의 장중한 행렬마저도 이 느낌을 다 표현하진 못한다. 앞으로도 수 없이 반복될 난관, 그 한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을 성당 모습이 같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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