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한 글자 한 글자 조합해 한 권의 책으로 활판 인쇄의 매력에 빠지다
역사책에서 봤던 금속활자 직접 만지며 활판 인쇄에 묻어나는 가치 되새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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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서양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개발한 인쇄 종주국입니다. 하지만 최근 기술 발달로 인쇄 공정이 자동화되면서 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 소리는 더는 듣기 어려운 현실이 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활판 인쇄에 비하면 컴퓨터 인쇄는 비용·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활판 인쇄는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멋이 있답니다. 우리가 종종 e메일 대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손편지를 보내고,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보다 조작이 까다로운 LP로 음악을 감상하며 아날로그(analog)한 감성을 느끼는 이유와 같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활판 인쇄술을 활용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활판 인쇄 책을 간행하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해 소년중앙 학생기자단이 출동했습니다. 윙윙~ 탕탕~ 딸각! 정겨운 소리가 가득한 활판공방으로 떠나볼까요.
」

경기도 파주시 출판도시에 있는 활판공방의 문을 열자 달그락거리는 활자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했어요. 백경원 실장이 박시은·송윤서 학생기자를 반갑게 맞았죠. “국내에서 유일하게 활판 인쇄로 책을 만들어 내는 활판공방에 온 것을 환영해요. 활판 인쇄는 금속에 일일이 자모(字母)를 새겨 만든 활자를 기계에 걸어 인쇄하는 기술을 말해요. 여러분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책·신문 등 대부분의 인쇄물은 활판 인쇄를 통해 간행됐죠. 하지만 이후 기술의 발달로 대량·고속 인쇄가 가능해졌고, 손이 많이 가는 활판 인쇄는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어요.”

이런 활판 인쇄를 안타깝게 여기고 다시 한번 생명의 숨을 불어넣고자 힘쓴 이가 바로 박한수 활판공방 대표입니다. 그는 1996년부터 발품을 팔아 전국 곳곳서 활자·주조기·인쇄기 등 활판 인쇄와 관련된 제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죠. 하지만 하드웨어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활자와 기계가 갖춰져도 그 기술을 구현할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니까요. 또다시 전국을 누비며 전문적인 활판 인쇄 기술을 갖춘 장인을 찾았죠. 박 대표의 설득에도 활판 인쇄 장인들은 “이미 쇠퇴한 활판 인쇄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대요. 하지만 금속활자 발명국의 후손으로서 우리 활자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피력했고, 결국 인쇄출판계 종사자·문인·북 디자이너까지 힘을 더해 2007년 활판공방을 세웠습니다.

“활판공방에서는 어떤 책을 만드나요?” 시은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지난 2008년 이근배 시인의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를 발간한 이후 시인들이 직접 고른 시를 담은 시선집을 활판 인쇄하고 있어요. 이따 활판 인쇄를 직접 체험하며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문선(원고에 있는 글자를 순서대로 찾아 모으는 작업), 조판(원고에 맞게 판을 짜는 작업), 교정, 인쇄, 제본 등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죠. 1시간에 1500장 정도 인쇄하는데, 시선집 한 권을 만드는 데 두 달가량 시간이 걸릴 정도로 섬세하고 힘든 작업이랍니다. 현재 50권가량의 시집이 출간됐고, 앞으로 총 100명의 시집 100권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체험에 앞서 활판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구텐베르크 전시관을 둘러볼까요.”

구텐베르크 전시관에는 세계 최대의 북 프레스기 등 서양의 여러 활판기계와 활자본이 전시돼 있어요.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55년 활판 인쇄술을 통해 서양 최초의 금속 활자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42행 성서』를 인쇄한 인물이죠. 우리나라가 이보다 앞선 1234년 『상정고금예문』을, 1377년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했음에도 구텐베르크는 근대 활판 인쇄술의 혁신자로 불립니다. 윤서 학생기자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인쇄기를 발명해 우수한 품질의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백 실장의 답이 돌아왔어요.

당시 서양에서는 압착기로 포도알을 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구텐베르크는 압착기의 개념이 종이에 잉크를 남기는 과정(인쇄)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죠.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는 활판을 인쇄기에 놓고 세게 압착해 종이에 찍어내는 기계를 발명했고, 훗날 포도주를 만드는 압착기(press)에서 이름을 따 인쇄기(press)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동양의 활판 인쇄술로는 온종일 40장 정도의 인쇄물밖에 찍어낼 수 없었지만,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이용해 하루에 몇백 장도 인쇄할 수 있었어요.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대량 인쇄하자 과거 성직자·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성서가 대중화됐고, 지식·정보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활판 인쇄술이 서양보다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의 대중화에 기여하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그보다 빨리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만드는 등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죠. 1972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은 『42행 성서』였는데요.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연구원이었던 박병선 박사가 우연히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했고,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발간된 책’이라는 내용이 적혔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물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어요.
활자를 주조하는 데도 우리나라는 서양의 것보다 높은 기술력을 보유했습니다. 독일의 금속 활자는 섭씨 360도에서 녹는 납을 주재료로 사용해서 만드는 과정이 빠르고 간단하죠.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1200도에서 녹는 청동을 이용해 더 섬세한 기술과 긴 제조 시간이 필요했어요. 대신 독일의 금속 활자에 비해 튼튼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죠.

“금속 활자가 튼튼하고 실용성이 높은 건 알겠는데, 목판 인쇄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윤서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목판 인쇄는 금속 활자 발명보다 빠른 6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커다란 나무판에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서 만드는 방식이었는데, 한 글자만 잘못 새겨도 나무판 전체를 폐기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죠. 여러분이 일기를 겨우 다 썼는데 마지막 한 글자를 틀려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면 너무 힘들겠죠. 또, 새로운 책을 만들 때마다 목판을 새로 파야 하므로 수많은 나무가 필요했고, 불·물에 취약해 금방 망가졌어요.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목판 역시 빛·바람·습도로부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아래쪽에 공간을 두고 창살을 설치하는 등 특별한 보관법을 사용하고 있죠. 반면 금속 활자는 나무보다 튼튼하고 하나씩 따로 만들어놓은 활자를 내용에 맞게 배열해 찍은 뒤 다시 보관·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시은 학생기자가 “어렵고 힘든 작업이라 전수자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전통 활판 인쇄술이 잘 전수되고 있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백 실장이 학생기자단을 다시 공방 인쇄실로 안내했죠. “여기 계신 숙련된 장인들이 모두 우리나라 활판 인쇄술을 보존·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십 년 전부터 활판 인쇄를 전문으로 해왔고, 지금도 활판공방에서 그 맥을 잇고 있는 산 증인이죠. ‘인쇄하는 데 기술자까지 필요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활자·인쇄기 같은 기계만큼 중요한 게 사람이랍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활판 인쇄량이 크게 줄며 대를 이을 기술자를 찾기 힘든 현실이에요. 활판공방의 또 다른 숙제죠.”

활판 인쇄는 크케 ▲주조(鑄造) ▲문선(文選) ▲조판(組版) ▲인쇄(印刷) 4단계로 나뉩니다. 각 단계마다 전문 장인이 존재할 정도로 세분화돼 있는데, 크게 활판 장인이라 부르죠. 주조 분야는 아주 복잡한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체험할 수 없어요. 문선공은 빼곡히 채워진 수천 자의 활자 속에서 필요한 글자만 빠르게 뽑아내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조판공(식자공)의 경우 결과물을 상상하며 공백을 메워야 하기 때문에 가장 힘들죠. 인쇄공은 매우 까다롭고 정교한 활판 인쇄기를 다루며 1/1000mm의 오차까지 조율해 마무리 작업을 합니다.
본격적으로 공방 탐색에 나선 학생기자단. 백 실장은 낯선 형태의 기계를 가리키며 “활판 인쇄의 가장 기본인 활자를 만드는 주조기”라고 소개했죠. “자모를 주형에 넣고 350도에 녹인 납을 주입해 활자를 만들어요. 한 번에 한 종류의 활자만 만들기 때문에 ‘소’ ‘년’ ‘중’ ‘앙’ 4글자를 동시에 만들 수는 없죠. ‘소소소소소…’를 쭉 뽑아낸 뒤 ‘년’ ‘중’ ‘앙’을 차례로 찍어내는 원리예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8포인트 크기 활자의 경우 1시간에 약 7000자 정도 만들 수 있어요.”

주조기에 가까이 가자 얼마 전 만든 ‘다’ 글자가 늘어서 있었어요. 마치 문양처럼 보이는 활자에 학생기자단이 감탄했습니다. “여기서 퀴즈. 활자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글자 부분이 닳고 무뎌져 잘 찍히지 않겠죠. 이렇게 사용가치가 떨어진 활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백 실장은 “다시 녹인 뒤 얼마든지 재가공할 수 있다”고 했어요. 주조기 주변에 가득 쌓인 활자들 모두 수명을 다한 뒤 새로운 활자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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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역사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용이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왜곡·훼손이 일어날 수 있죠. 인쇄 기술의 발전은 기록을 통해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보존하려는 인간의 욕구에서 시작됐어요. 활자를 사용해 똑같은 서류를 여러 장 만드는 인쇄술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고대
압인법(押印法): 원통에 문자·그림을 새기고 이를 점토판 위에 굴리거나 눌러서 자국을 만들어 내는 방식.
날염법(捺染法): 나무·금속 등의 판에 그림이나 무늬를 새긴 뒤 천에 날염하는 방식. 목판 인쇄술 출현의 발판이 됨.
탁인법(拓印法): 글자를 새긴 석면에 종이를 놓고 물을 축여 붙게 한 다음 부드러운 헝겊 등에 먹물을 묻혀 찍어내는 것.
7세기경
목판 인쇄: 목판(木板)을 사용하여 책을 찍어내는 인쇄법으로 책의 내용을 나무에 새겨 먹을 칠하고 종이에 찍어낸다. 목판 인쇄본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704∼706년 신라 성왕(聖王) 때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이다.
14세기경
금속 활자 인쇄: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부터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1234년 발간된 『상정고금예문』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은 1377년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다.
현대
활판 인쇄: 금속 활자를 이용해 대량으로 인쇄하는 방식. 활자로 짜인 판을 기계에 걸어 인쇄하는 원판인쇄를 비롯해 연판·전주판·선화볼록판 등을 포함한다. 우리나라에선 1960년대 책·신문·잡지 등을 간행하는 데 활판 인쇄법이 널리 쓰였으나, 1980년대에 이르러 컴퓨터·인터넷 보급, 인쇄 기계·사진술 발달 등으로 인쇄 과정이 자동화되며 대부분 사라졌다.
근미래
디지털 인쇄: 3D 모델링 기술·광경화 적층 방식(SLA) 등 첨단 과학의 발전으로 3D프린터·차세대 디스플레이 등 디지털 인쇄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학교에서 역사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가 활판 인쇄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배우긴 했지만 직접 그 과정을 보고 체험해보니 더 새롭게 다가왔어요. 제가 직접 잉크를 묻히고 기계를 돌려 문구를 인쇄하는 과정이 가장 흥미로웠죠. 노력과 열정을 쏟아 만든 활자가 문구로 완성돼 종이에 찍힌 걸 보니 뿌듯했습니다. 또 주조기는 연식이 꽤 오래됐음에도 육중하고 고유의 멋스러움이 있었어요. 요즘에는 컴퓨터와 기계가 활판 인쇄를 대신해서 관련 기술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요. 소중 친구들도 우리나라의 훌륭한 역사와 기술이 담긴 우리 전통 활판 인쇄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송윤서(경기도 서정중 1) 학생기자
글=박소윤 기자 park.soyoon@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박시은(서울 여의도초 5)·송윤서(경기도 서정중 1)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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