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겉옷 벗긴 '해님' 단추 하나 풀지 못한 '바람'

2021. 8. 2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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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

문제를 억지로 풀려고 할수록 시장은 도리어 잠그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 읽었던 이솝 우화 ‘해님과 바람’이 주는 교훈이다. 바람은 해님에게 지나가는 나그네의 겉옷을 벗게 하자는 내기를 제안했다. 나그네는 바람이 세게 불수록 단추를 더욱 단단히 잠갔지만, 태양이 비치자 단추를 풀고 겉옷을 벗었다.

그간 부동산 정책은 ‘바람’과 같았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매물 잠금 효과(lock-in effect)’다.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중과해 매도를 유인했으나, 단추를 더욱 굳게 잠그듯 매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다주택자가 매도하려면 지방세를 포함해 최고 82.5%에 달하는 양도세율을 감당해야 한다. 차익이 발생해도 절대적인 비중이 세금으로 환수된다는데, 세금 두려움 없이 매물을 내놓을 이가 별로 없다. 오히려 시장에서는 매도 대신 증여를 선택하고 있다. 2021년 상반기 주택 매매는 전년 동기 대비 9.9% 감소했는데, 주택 증여는 32.4% 증가했다. 정책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 목표는 ‘주거 안정’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가격 안정’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없다. 주택 가격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지워야 한다. 주택 가격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해지는 것’이다. 가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주체는 ‘보이지 않는 손’뿐이다. 가격이 상승해 주거 불안을 느끼는 계층을 위해 주택을 공급하고, 타인을 속여 이익을 편취하는 부동산 사기를 차단하는 등 건전한 시장을 조성하는 데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센바람을 뿜어대도 나그네의 단추를 풀 수는 없다.

여기서 ‘주거 안정’이라는 정책 목표 대상은 ‘세입자’여야 한다. 즉 주택 가격이 아닌 전월세 가격 안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주택자’가 필요하다. 다주택자가 여러 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곧 여러 채의 임대를 공급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주택자가 집을 매도할 경우, 전세 공급이 더 부족해지고 전세난 문제는 가중될 수밖에 없다. 다주택자 규제는 곧 전월세 시장 불안으로 이어진다.

주거 안정과 함께 ‘공급’을 늘리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공급 정책은 실패에 가깝다. 2020년 정부가 발표한 ‘8·4 부동산 대책’은 ‘공급 폭탄’을 운운하며 마치 으름장을 놓듯 대규모 주택 공급을 약속했지만, 1년이 훌쩍 지난 지금 폭탄은커녕 총알도 보이지 않는다. 태릉CC나 과천청사 일대의 택지를 개발해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은 아직 개발 구상도 못 세웠다. 기존 주택건설 인허가 실적 부진으로 내년과 내후년 주택 공급량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인허가 실적은 2015년 76만5000가구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0년 약 45만8000가구로 줄었다. 인허가 이후 착공·준공에 이르기까지 약 2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늦었지만 주택 공급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가격 안정’이 아닌 ‘주거 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부동산 시장이 정상화될 수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4호 (2021.09.01~2021.09.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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