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조선 사람 광주시민 서서평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2021. 8. 1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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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조선 사람으로 살다 조선 땅에 묻힌 그에게 '우리나라'는 어디일까

[서부원 기자]

 광주 근대문화의 발상지인 양림동 일대의 모습. 숲 오른쪽 건물은 호남신학대학교이며 그 뒤편에 서서평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 서부원
 
"지금 굶주리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과 다른 나라 사람 두 명이 있다고 하자. 네가 가진 빵 한 조각을 둘 중 누구에게 건네겠느냐?"

어리석은 질문이다. 정답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빵은 두 사람 중 더 오래 굶주린 이에게 건네져야 마땅하다. 헐벗고 굶주린 이들 앞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따위의 금언은 야박하고 잔인한 언설일 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내 상식을 비껴갔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해도 일단 우리나라 사람부터 살리고 나서 다른 나라 사람을 도와야죠. 이건 이기적이라기보다 인지상정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른다. 언어든, 생김새든, 피부색이든, 하다못해 국적이라도 같아야지, 그러잖으면 타인의 고통 앞에서 선뜻 손을 내밀기 주저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은지심도 우리 가슴 속에선 핏줄에 대한 고정관념과 문화적 이질감에 따라 서열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애먼 북한을 우리가 왜 도와주어야 하죠?"

식량이든 비료든 코로나 백신이든 북한을 돕자고 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던지는 질문이다. 6.25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이야 그렇다 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다. 그럴 여유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부터 챙기라며 힐난한다. 

그런데 군부 쿠데타와 내전 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미얀마와 아랍,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자고 하면, 되레 북한을 끌어들여 부당함을 나타낸다. 한 핏줄인 북한도 돕지 못하는 판국에 다른 나라 사람들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느냐며. 그들은 대개 북한 돕기에 인색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설명대로라면, 받는 이의 절실함과 상관없이 빵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건네지게 될 것이다. 우선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이웃, 고향 사람, 대한민국 국민, 북한 사람, 그리고 외국인 순. 아마 같은 외국인이라도 개인적 호불호에 따라 국가의 서열이 매겨질 것이다. 

물론, 핑계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정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남없이 발 벗고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외국인이어서, 북한 주민이어서, 다른 고장 사람이어서 돕기가 꺼려진다고 말하는 이라면, 애초 남을 도우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서서평의 무덤 인근 도심 속 공원의 댓돌에도 선교사를 비롯한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새겨놓았다.
ⓒ 서부원
 
아이들의 각박한 대답이 떠오른 건, '조선 사람' 서서평을 만나고서다. 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으로 독일 태생의 미국인이다. 1912년 서른둘의 늦은 나이로 조선에 파송되어 인술을 실천한 간호사이자 남장로회의 여성 선교사다. 

사실 난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 서세동점의 시대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자처한 그들을 두둔하기란 어렵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무너진 라틴아메리카의 문명과 영국과 프랑스 등에 의해 난도질당한 아프리카의 역사가 오롯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전해진 조총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 무기였으며, 대원군 집권 시기 두 차례의 양요와 구한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신축년 농민항쟁도 그들과 관련이 깊다. 선교사들은 늘 제국주의와 매판 세력의 편에 섰다. 

제국주의 침탈의 길을 열어준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포교였다.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정부에도 기꺼이 협력했다. 갑신정변 당시 칼에 찔린 민영익을 치료해준 대가로 받은 막대한 사례금으로 제중원(이후 세브란스)을 설립한 알렌이 그 예다. 

이후 왕실의 주치의가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그는 의사도 선교사도 아닌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정치인이었다. 정2품 벼슬에 올라 대미 외교를 주도한 핵심 실세였다. 그가 모든 선교사의 '모범'이었을지언정, 조선의 이권 강탈에 여념이 없는 제국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포교도 제국주의 질서에 순응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절차였던 셈이다. 권력 편에 선 선교사들은 식민지 백성 위에 군림했고, 기존의 전통문화를 낡은 폐습이라며 무질렀다. 당장 그들이 설립한 학교와 병원도 제국주의 침략의 선전 도구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서서평의 자취가 서린 광주 양림동의 골목길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있다.
ⓒ 서부원
 
물론, 모든 선교사가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건 아니다. 드물지만,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이들도 있다. 조선 옷을 입고 조선 말을 쓰며,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 사람과 같은 집에서 평생을 보낸 선교사들의 삶이 제국주의자로 살다간 이들의 행적을 가려주고 있다.

서서평이 바로 그런 선교사다. 고백하건대, 그의 이름을 붙인 골목길이 있고, 이곳 광주의 작은 언덕에 한국 이름이 새겨진 그의 무덤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 난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난 2017년에 그의 숭고한 생애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는 미혼모인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뒤 조선으로 의료 봉사를 자원했다. 조선 사람이 되고자 평생 독신으로 살며 수많은 고아를 입양했고, 버림받은 과부들과 함께 생활했다. 나환자들의 인권 운동에도 힘써 총독부를 압박해 소록도에 나환자촌을 설립하도록 했다. 

어릴 적 자신처럼 버림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병자와 고아,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만을 향했다. 1934년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남은 거라곤 반이 잘려 나간 낡은 담요와 동전 몇 푼, 그리고 옥수숫가루 2홉이 전부였다. 

그의 장례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수천 명의 시민과 나환자들이 그의 운구를 따라가며 '우리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했다고 전한다. 조선에서 지낸 22년 동안 그는 조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완전한 조선 사람이 되었고, 시신마저 조선 땅에 묻혔다. 

푸른 눈의 조선 사람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잠든 서서평의 소박한 무덤. 묘비에 그의 본명과 생몰연도와 일자가 새겨져 있다.
ⓒ 서부원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도 한참 동안 그의 무덤 앞을 떠나지 못했다. 세월의 더께에 봉분은 납작해졌고 묘비의 글씨도 많이 닳았지만 조금도 남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듣자니까, 매일 누군가 그의 무덤을 찾아온다는데, 그날도 묘비 앞에 하얀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명색이 광주의 역사 교사로서, 지금껏 왜 그의 이름을 몰랐을까. 알렌의 생애와 그가 세운 제중원에 대해선 미주알고주알 다 알면서, 왜 '조선에 재림한 예수'라고 불렸던 그와 그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에 대해선 그토록 무지했을까. 주요 활동 무대가 서울이 아닌 광주라서? 아니면 여성이라서? 

그가 평생 조선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마음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저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라고 말한다면 게으른 답변일 테다. 그의 침대맡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으로)라는 좌우명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에게 선교란 버림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봉사일 뿐이었고, 그러자면 기꺼이 조선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 사람으로 살다 조선 땅에 묻힌 푸른 눈의 선교사에게 과연 '우리나라'는 어디일까. 그가 태어난 곳은 독일이고, 간호사가 된 곳은 미국이며, 선교사로 반평생을 헌신한 곳은 식민지 조선이다. 나고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그가 살다 묻힌 곳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부끄럽게도 난 그를 몰랐지만, 이곳 광주시민들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서서평이라는 이름을 곳곳에 새겨놓았다. 선교 기념관에서, 소박한 무덤의 묘비에서, 도심 속 공원의 계단에서, 그리고 그가 생활했던 마을의 골목길에서 그를 만난다. 아무도 그를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름 지어 부른 것처럼 그는 조선 사람, 광주시민 서서평이다. 

개학하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면서도 '북한을 우리가 왜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되묻는 아이들에게 서서평의 삶을 들려줄 생각이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언젠가 그들과 함께 하루 답사를 떠날 계획도 세웠다. 이 '푸른 눈의 조선 사람'을 만나는 순간, 아이들의 각박한 마음이 따스하게 덥혀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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