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루트] 역사적 인물 키워낸 '오세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라영철 2021. 8.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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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온몸 바친 만해 한용운
충(忠) 위해 출가..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이항복 후손 조선 후기 유학자 이유원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1865년(고종 2년) 남호스님(南湖, 1820~1872)이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봉안했던 팔만대장경 인경본(印經本)은 50 궤짝 6000여 권에 달했다.

그러나 '대장전(大藏殿)'을 지어 경전을 보관해오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모두 소실됐다. 오세암에서 85년의 짧은 세월이었지만, 그 존재는 조선 후기 설악산을 다녀간 유람객과 유학자, 선교사, 문학자, 불자들에 의해 알려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05년에 백담사에서 출가한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오세암에서 대장경을 접하고 불교 수행과 공부를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님의 침묵` 시를 발표하고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했으며, 인제군에서는 매년 8월 광복절을 전후해 '만해 축전'도 열리고 있다.

이처럼 전통사찰 오세암에 팔만대장경 인경본(印經本)과 그 보관처가 있었다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고 있었던 불교 문화의 역사성을 살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역사적 인물들을 키워내고 강원문화의 정체성과 설악권 문화유산의 토대로서 대장경이 봉안된 오세암을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① 설악산 법보(法寶) '오세암'과 '대장경'

② 역사적 인물 키워낸 '오세암'

설악산 오세암 [인제군 제공]

② 역사적 인물 키워낸 '오세암'

■ 만해 한용운, 오세암 대장경 만나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년) 선생은 한국 근현대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국내에서 독립운동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물 중에서도 변절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만해 사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고,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다. 27세에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한 그는 설악산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불교에 귀의(歸依)했다.

만해 한용운 [인제군 제공]

백담사 암자 오세암에 팔만대장경 인경본(印經本)이 봉안된 지 30여 년이 지난 1896년 충남 홍성 사람인 한용운이 오세암에 들어왔다. 오세암의 팔만대장경 인경본은 만해 한용운을 스님으로, 시인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키워준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그는 1905년에 백담사에서 출가하고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윤형준 인제군 학예연구사는 "만해 선생을 통해서 오세암에 80여 년 동안 있었던 대장경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와 불교 유산이 민족 유산 역할까지 한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만해 선생은 1944년 서울 자택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하기까지 40여 년간 '조선불교 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등을 집필하고 독립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화엄경 등 불경을 한글로 해석했고, 안심사에 있던 한글 경전 인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만해 선생의 불교사적 업적과 문학사상이 싹 틔워진 것은 오세암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만났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담사 만해기념관과 야송의 오세암도 [만해기념관 제공]

1910년 경술국치 때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조선 땅이 감옥인데 방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며 늘 냉방에서 지내다 염원했던 광복을 목전에 두고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심우장에는 만해의 친필 원고, 유품, 연구 논문집, 서화, 초상화, 옥중 공판 기록 등이 남아있다. '심우(尋牛)'는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매월당 김시습과 오세암

학암당(鶴岩堂)의 '경각중건기'에 따르면, '오세암'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암자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 학자 김시습은 천재적인 재질을 갖췄다. 그는 세종 17년(1435) 서울에서 태어나 성종 24년(1493) 58세로 충청도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은 3세 때 한시(漢詩)를 지었고, 5세 때는 중용(中庸), 대학(大?)을 읽고 해석하고 통달해 '오세(五歲) 신동'이라 불렸다. 그의 명성에 세종대왕은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그를 불러 재주를 시험했다.

세종은 김시습의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하는 싯귀를 불러 댓귀를 짓게 했다. 김시습은 곧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닷속에서 굼틀거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에 세종은 감탄해 후하게 상을 내렸고, '오세 신동'이라는 그의 별칭 때문에 이 관음암을 '오세암'이라는 설이 있다. 김시습은 세종의 은총을 깊게 입은 터라 어릴 때부터 마음속 깊이 세종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한결같이 학문의 길에 정진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가 21세 되던 해에 궁중에서 세종의 손자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손위(遜位) 사건이 일어나자, 청운의 뜻을 품었으나 좌절하고 실의에 찼다.

이후 세종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단종(端宗)에게 충성을 다함으로 생각하고 삼각산(三角山)에서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방랑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호를 다시 설잠(雪岑)으로 하고 거짓 미치광이가 돼 세상을 조롱하며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슬픈 시가(詩歌)로 자신의 설움을 달랬고, 그때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와 지내게 됐다. 이런 매월당 김시습을 시승(詩僧), 기인(奇人)이라고도 불렀다.

■ 고전문학가 이은상이 본 오세암 대장경

[인제군 제공]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은 1933년 10월 설악산을 열흘간 유람하면서 오세암을 찾았다.

당시 오세암 주지인 인공선사(印空禪師)의 안내로 법당과 대장경을 보관하는 2층 건물을 구경하고 대장경(大藏經)이 봉안된 유래와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발낭(鉢囊)을 벗어 한쪽 구석에 밀쳐두고 주지(住持) 인공선사(印空禪師)의 인도를 받아 원통전(圓通殿) 법당 안으로 들어서서 잠깐 쉰 다음에 이층 대장전(大藏殿)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대장전에 쌓아놓은 장경(藏經)은 실로 이 절의 중보(中寶)라고 하겠거니와 이것은 고종 원년(1864년)에 보개산(寶蓋山)에 남호선사(南湖禪師)가 대장경을 인출하여 명년 팔월에 이곳으로 실어와 암자 뒤편에 건각(建閣)하고 간직하였던 것이나 풍우와 교공(交工)으로 불과기견(不過幾年)에 동경서퇴(東傾西頹)하여 조석담례(朝夕膽禮)에 사승(寺僧)의 불안(不安)이 끊이지 않다가 건각 한 지 십일 년 후(十一年後)에 이 신기(新基)를 복축(卜築)하고 차차로 단연(檀緣)을 널리 모아 이층 고각(二層高閣)을 짓고 여기다 보관케 된 것입니다."

노산 선생은 오세암에 보존돼 있던 매월당의 유상(遺像)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조도 읊었다.

"임은 가셨건만 임을 여기 뵈옵니다. 끼치신 이 얼굴이 너무 분명하오이다. 눈감고 임의 영혼도 이제 마저 뵈옵니다."

■ 유학자가 오세암 대장경 보고 남긴 시(詩)

조선 후기 유학자 이유원(1814~1888)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이항복(李恒福) 후손으로 유명하다.

그가 언제 오세암의 대장경을 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대략 1865년 수원유수로 좌천, 1873년 대원군 실각 이후 영의정이 되기 전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유학자 이유원의 시 [인제군 제공]

당시 그의 유람 경로는 대승폭포~수렴동~오세암~마등령~비선대 구간이었으며, 오세암에서 대장경을 보고 그 감흥을 시로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유원은 오세암에서 대장경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대장경(大藏經)

내 서역에서 온 사찰 오세암에 머무니

꿈 속 넋은 꽃향기에 촉촉이 젖네

신령스런 조판(雕板)은 멀리 설악산에

완전한 책은 정양사(正陽寺)에 보관하는데

50상자 만들어 방 한 칸을 채우고

7천편으로 삼장(三藏)을 풀이하니

사문(沙門)의 공덕은 당나라 황제 덕분이고

만물은 마침내 복을 심은 곳으로 돌아가네

윤형준 인제군 학예연구사는 "1865년에서 1873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유원 유학자가 대장경을 보고 시를 남겨 그 당시에도 오세암에 대장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 영국 성공회 신부가 본 오세암 대장경

영국 성공회 트롤로프 주교와 찰스 헌트 신부가 오세암에서 본 대장경 [인제군 제공]

1923년 낯선 영국인 트롤로프(Trollope) 주교와 찰스 헌트(Charles hunt) 신부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보고 기록을 남겼다.

"멋진 날이다. 아름다운 암자 영시암까지 곳곳에 연못(沼)이 자리한 그림 같은 골짜기를 지나다. 여든 살도 더 되어 보이는 노승이 홀로 거처하고 있다. 능선을 따라 오르며 시내를 건너 원명암을 지나 1시경 오세암에 도착. 계곡에 ‘성모의 심장(Coeur de Notre Dame)이 잔뜩 피어있는 걸 보았다. 오세암은 웅장한 해발 3200피트의 원형 분지 속에 위치한 매력적인 암자인데 활력 넘치는 몇 명의 노승을 포함해 8~10명가량의 승려가 머물고 있다. 2층 절로 위층에는 훌륭한 부처님의 경전 모음과 ‘두보’라는 당나라 시인의 시 전집이 소장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산과 산, 끝이 면도날처럼 뾰족한 가파른 절벽이 연달아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는 금강산의 마하연에서 보는 광경에 필적한다." 『조선』 제24호 '설악기행일기', 영국 왕립 아시아협회 한국지부, 1934.

트롤로프 주교는 대한 성공회 3대 주교로 강화 성공회 성당을 설계, 운수리 성당과 성공회 서울성당을 신축했다. 한국 관계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고, 오세암 방문기 내용 서술로 볼 때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고 전해진다.

트롤로프 주교와 찰스 헌트 신부는 서울에서 출발해 금강산 장안사~건봉사~백담사~오세암~신흥사~낙산사 등 조선의 사찰을 방문했다고 한다.

영국 선교사 찰스 헌트 신부의 설악기행일기 [인제군 제공]

1934년 찰스 헌트 신부는 '조선'이란 잡지에 설악 기행일기(Diary of d trip to Sul-ak san)라는 방문기를 발표했다. 방문기에는 대장경을 보관한 전각인 대장전(大藏殿) 건물과 스님들의 사진을 수록해 당시까지 보존되던 오세암 팔만대장경 역사를 밝혀주는 유일한 자료가 됐다.

윤형준 인제군 학예연구사는 "찰스 헌터 신부가 찍은 사진이나 신문 기사에 나왔던 것과 노산 이은상이 본 것을 기록해 놓은 걸 읽어보면 오세암에 2층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라고 말했다.

■ 오세암 전설

강원도에는 사찰 창건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전설이 많지만, 일부 전설은 사찰 개명과 관련해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제군 북면에 있는 암자 오세암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전설이다.

강원도사(제24권 민속 구전·예술)에 따르면, 설정(雪頂) 스님이 부모 잃은 어린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키운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스님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아이만 암자에 남겨둔 채 마을로 내려간다.

스님이 양식을 구해 암자로 가려고 했으나 폭설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렸다. 이른 봄, 눈이 녹기 시작하자 스님은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다.

오세암과 강원도사 [인제군 제공]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스님이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자 어머니(관음보살)가 매일 양식을 주었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의 선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경전을 주고 청조(靑鳥)가 돼 날아갔다. 아이가 5세에 득도하였다고 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래서 설정 스님의 조카 동자로 인해 '오세암'이라 하였는지 또는 김시습의 '오세 신동'으로 인해 '오세암'이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은 후자의 설이 옳았다고 했다.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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