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박세리도 결국 피해자" 폭력에 가까웠던 시선들

하성태 2021. 8. 1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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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의 사이드뷰] KBS <다큐 인사이트> 통해 본 '스포스 스타 6인의 투쟁기'

[하성태 기자]

"김연경 선수 키가 원래 186cm 정도 됐는데 입단하면서 키가 또 크고 있대요. 아직도 성장 중입니다. 그러면 1m 90cm도 가능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찌 됐든 우리 한국배구로서는 좋은 일이죠. 김연경 선수가 기대주입니다." (2005-2006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시범경기 KBS 중계 아나운서)

그 키가 더 자라 192cm가 됐다. 남성 해설위원이 "오랜만에 여자배구의 대형 신인이 나타났다"며 연신 탄성을 지르던 그 스무 살 기대주는 그렇게 또 성장했다. 그리고 16년 후, 세계배구연맹은 김연경을 가리켜 "10억 중 단 1명"이라고 추켜세웠으며, 그렇게 세계를 호령하는 슈퍼스타가 됐다.

"김연경이란 걸출한 선수가 나왔기 때문에 여자 배구를 많이 취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취재 분위기가) 김연경 선수가 나오기 전에는 스포츠는 남자만의 것으로 여겨졌었고, 여자는 주변인이란 인식이 컸었거든요. 김연경 선수가 나오면서 그런 인식을 한방에 무너뜨렸죠." (KBS 스포츠 기자 박주미)

12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이 길어올린 1990년대엔 진짜 그랬다. 배구 코트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이들은 일명 '오빠 부대'였다. 여자배구와 남자배구의 인기 차이는 현격했다. 
 
 12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
ⓒ KBS
 
신인 선수를 당대의 스타와 비교하는 트렌드도 여전했다. 김연경은 당시 '여자 김세진'이란 별칭에 대해 "영광스럽고 좋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난데, 그런 생각도 했던 거 같다"며 씁쓸해 했다. '여자 김세진'이 아닌 신인왕 김연경은 데뷔 첫해 6관왕을 휩쓰는 전무후무한 배구선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후 김연경 선수는 해외 진출을 통해 세계 배구계를 호령하는 랭킹 1위 선수로 승승장구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도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런 성적에도 불구하고 남자선수 위주의 시선은 바뀔 줄 몰랐다. 문제는 그런 차별의 시선이 실질적인 차별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제작진의 지적대로,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은 뒤 '김치찌개 회식' 대접을 받은 거로 유명했다. 그뿐 아니라 올림픽 여자배구팀에 대한 지원 부족으로 김연경 선수가 직접 통역에 나서야 했다. 국제 경기에 출전한 남자 배구팀 전원에겐 비즈니스석을 제공하고 여자 선수들은 절반만 제공했다는 배구협회의 행태는 몰상식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여성 스포츠인 6인의 통쾌한 이야기'를 표방한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편의 제작의도는 김연경 선수를 비롯한 6명의 한국 여성 스포츠 스타 선수들에게 단순히 찬사를 보내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성장사를 다루는 동시에 이들과 세상의 모든 여성 선수들이 벌여온 투쟁의 역사, 그리고 스포츠계와 세상의 변화를 두루 살피는 돌직구와 사려 깊음을 동시에 갖춘 흔치 않은 다큐였다.

생존기와 투쟁기를 넘어
 
 12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
ⓒ KBS
 
일찌감치 알아봤다.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을 연출한 이은규 PD는 지난해 '개그우먼' 편을 연출해 호평을 이끌어 낸 바 있다(관련 기사 : 박나래도 들었던 의아한 한마디, '개그콘서트' 몰락의 '단서').

"내가 잘해야 후배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악착같이 뛰어다녔다던 KBS 공채 1기 개그우먼 이성미는 왜 "여자 개그맨들이 (남자들보다 더) 몸을 사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지를 역설했다. 그를 포함해 역시나 6인의 선후배 개그우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어느 곳보다 차별적인 시선이 만연한 방송국에서 여성 개그우먼들이 어떻게 명멸해갔고 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들려주는 생생하고 가슴 아픈 생존기이자 투쟁기였다.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미 세계를 제패하고 자기 종목에서 일가를 이룬 여자 선수들이 들려주는 생존기와 투쟁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여전한 차별과 여성혐오가 만연한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는 한편, 변화 지점들을 모색하고 그 변화의 가치가 여성선수들에게, 여성들에게, 그리고 사회 전체에 어떤 의미인지를 역설하고 있었다.

'김연경 보유국'이란 유행어를 낳은 김연경 선수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풍조를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누군가가 얘기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라던 김연경 선수의 말은 단순해서 더 투명한 진실이었다. 

박주미 KBS 스포츠 기자의 입을 빌린 제작진은 그런 김연경(과 선후배들)이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팀과 달리 여자팀이 국제무대에서 활약해도 별다른 보상이나 대우를 해주지 않았던 오래된 관행을 김연경의 활약과 함께 깨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자배구는 이제 '올림픽 4강' 신화를 쓰고 남자배구 못지않은 인기를 얻게 됐다.

그런 선수는 또 있다. 역시나 해외무대에서 활약하는 영국 첼시FC 위민 소속 지소연 선수. 15살 때 한국 남녀 축구 통틀어 A매치 최연소 출전, 최연소 득점을 필두로 최다 득점(58점) 등 신기록을 죄다 갈아치운 지소연 선수는 영국 진출 이후에도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 2015 올해의 선수상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 현역이다.

영국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속 주인공처럼, 지 선수 역시 영국에서조차 차별적인 환경과 싸워야 했다. 여자축구에 무관심한 한국과는 달랐지만 영국리그에도 분명한 차별이 존재했다. 첼시 같은 부자 구단도 다를 바 없었다. 지 선수의 표현에 따르면 "공터 같은 곳에서" 연습이나 경기를 해야 했고, 남녀 선수 간 연봉 격차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150여개 팀이 융성했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간 여자축구가 금지됐던 여파일 수 있었다.
 
우리는 여성과 남성과 같이 축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겁니다.
(1992년 출범한 첼시FC 위민의 창단 당시 슬로건)

스타 플레이어인 지소연 선수 역시 적극적으로 변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인조 잔디 안 된다", "여자 선수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요구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매년 하나하나 바뀌어 나가는 걸 보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바꿔나가야 할 것 같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은 전체 파이를 넓히는 발판이 됐다. WSL(잉글랜드 여자축구 프로리그)은 2011년 출범 이후 평균 관중이 5배 성장했다. 그런 여성 스타플레이어들의 노력이 팬들을 움직이고 이를 통해 산업 전체나 관련 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냈던 것이다.  

또 한국 여자 축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 선수를 포함해 이제 WSL에는 총 4명의 한국 여자 선수가 뛰고 있다. 결과적으로, 김연경 선수나 지소연 선수 모두 한국을 넘어 세계 리그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는 여성 선수로 거듭난 셈이다.

이퀄 플레이, 이퀄 페이
 
 12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편.
ⓒ KBS
 
'이퀄 플레이, 이퀄 페이(equal play equal pay)'.

미국 여자 축구대표팀 주장 메건 라피노의 감동적이고 혁명적인 구호다. 세계 여자축구의 간판스타인 메건 라피노는 지난 2019년 팀 동료들과 미 축구연맹을 대상으로 남성 선수들과 같은 '동일경기 동일임금'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에 앞서 여성혐오와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마저 거절했던 메건 라피노가 남자 축구 선수들과 비교해 무려 10% 수준인 여자선수들의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제작진도 그런 구조적 문제를 놓칠 리 없었다. 박세리 한국 여자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은 '이퀄 플레이, 이퀄 페이'를 뛰어넘어버린 선구자라 할 수 있었다. 1998년 US 오픈 우승 이후 신화를 써내려간 박세리 감독은 이후 2019년 기준 6배가 차이 나는 미국과 달리 여자골프 대회의 상금을 남자대회보다 올려놓은 장본인이자 성별 장벽을 무너뜨린 이른바 '게임체인저'였다.

이처럼 '이퀄 플레이, 이퀄 페이'에 대한 좋은 예를 환기시킨 제작진은 이후 스포츠계에 만연한 구조적 차별을 다각도로 언급한다.

먼저 희귀한 여성 지도자 문제다. 현재 하계올림픽 국가대표 감독 중 여성은 여자탁구 현정화 감독과 여자농구 전주원 감독 단 둘 뿐이다. 시야를 스포츠계 전체로 넓히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2020년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체육지도자 중 남성은 무려 2만 2213명인데 여성은 4386명에 그쳤다. '코치는 성별 균형을 대표해 선발하며 IOC 집행위원 등은 기존 30%를 넘어 남녀 동일 비율이 되어야 한다'는 2018 IOC 성평등 리포트와는 동떨어진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올림픽팀을 2회나 이끈 박세리 감독은 골프계 후배들이, 스포츠계 전체 여자 선수들이 응원하는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어렵지 않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롤모델 자체가 희박하다. 미디어의 차별적, 여성혐오적 시선이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제작진의 시각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시아의 인어 최은희, 탁구여신 현정화, 시드니 올림픽 얼짱 공기소총 강초현, 런던의 양궁여신 기보배,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 배구 미녀군단' 등등.

"남자선수들이 유독 더 많이 방송에 보이고 노출이 됐었던 것 같다"는 박세리 감독이나 "항상 미녀군단을 붙입니다, 미남군단이라고는 안 하잖아요"라는 김연경 선수 모두 그런 시선의 피해자일 수 있었다. 또 그런 남성적인 시선은 여자선수를 타자화시키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던 것이다.

참으로 오래된 편견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박사조차 "여자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은 추하고 상스럽고 부적절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근대올림픽 출범 이후 100여 년이 넘는 동안 여성선수들은 그런 차별적 시선에 맞서왔고, 김연경 선수, 박세리 감독을 비롯한 6인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작진이 길어올린 몰상식하고 차별적인 미디어의 질문들은 가히 폭력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더 많은 분야를 할 수 있어요. 안 하고 찾지 못하고 시도를 안 했을 뿐 모든 것이 가능해요"라던 '게임 체인저' 박세리 감독의 자신감 넘치는 조언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선수들에게, 여성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제작진의 사려 깊은 메시지는 끝까지 계속됐다. 제작진은 방송 말미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52명 선수단 중 유일한 여자선수였던 '등 번호 984번' 육상 투원반 박봉식 선수를 필두로 올림픽에서 최초를 기록한 자랑스러운 여자선수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찬찬히 비췄다. 이들 모두 시도조차 어려웠던 종목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꾼 '게임체인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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