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일본史람]
[박광홍 기자]
1945년 8월 10일 새벽 1시. 도쿄의 궁성에서는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가 천황을 앞에 두고서 전쟁 종결에 관한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까지 대일전에 참전하여 빠르게 남하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은 일본이 역사상 직면했던 가장 중대한 과제였다.
▲ 패색이 짙어진 제국 일본의 상황도(1943년 11월 ~ 1945년 8월) 버마(미얀마), 필리핀, 뉴기니 및 태평양 도서 지역들이 함락된 데에 이어, 북쪽에서는 소련군의 쾌속진격이 개시되면서 만주국과 몽강국이 붕괴되던 상황이 지도에 드러나있다. |
ⓒ wiki commons |
취임 이래 지속적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해왔던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당시의 어전회의에서 육군 측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련은 불신(일소불가침 조약을 배신하고 대일전에 참전한 것을 비난하는 의미)의 나라, 미국은 비인도(일본 본토 공습 및 원자폭탄 투하를 비난하는 의미)의 나라입니다. 이런 적들에게 보장 없이 황실을 맡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억의 국민이 모조리 쓰러진다 해도, 우리는 대의에 살아야 합니다. 단, 4가지 조건(천황제 유지, 일본의 주권을 보장하는 점령, 일본에 의한 자체 무장해제, 일본에 의한 자체 전범재판)에 의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일본 육군 측 "일억 국민들 쓰러져도 천황제는 유지해야"
▲ 항전을 주장하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 아나미 대장은 항복에 반대하였지만 과격파의 쿠데타에 찬동하지는 않았다. 항복선언이 발표되던 8월 15일 새벽에 '죽음으로 대죄를 사죄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자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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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일본의 조건 제시에 대해, 미국은 '천황의 지위는 연합군사령부의 관리 하에 둔다'라는 답변을 내놨다. 일본 측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이 확실히 받아들여진 것인지 부정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편 육군의 과격파 장교들은 미국 측 답변을 '천황의 지위는 연합군사령부에 종속된다'로 해석하고 거세게 반발했다. 일부 장교들은 아나미 육군대신을 향해 '항복을 저지하지 못하면 할복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며 쿠데타까지 종용했다.
그러나 미국 측 답변의 애매모호함이나 군부 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는 항복이 지연될 경우 일본이 독일처럼 분단돼 버릴 것을 우려했고, 쇼와 천황 역시 이미 전쟁 종결에 대해 마음을 굳힌 상황이었다. 결국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는 미국의 답변을 수용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이 확정됐다.
육군의 강경한 입장을 대변해왔던 아나미 육군대신이 할 수 있던 것이라고는, 천황이 낭독할 항복선언문의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뿐이었다. 아나미 육군대신은 '일본이 패배해서 종전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종전하는 것'이라고 우기며 기존의 항복선언문 원안에 있던 '전국(전쟁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라는 문구를 '전국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로 고쳤다.
그러나 문구 일부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과격파 장교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앞서 아나미 육군대신에게 쿠데타를 종용했던 그들은 아나미 육군대신이 요지부동이자 자신들끼리 독단적으로 정변 계획을 진행시켰다. 오늘날 궁성사건(宮城事件)으로 불리는 쿠데타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항복 찬성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다음날 8월 15일에 예정된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을 저지한 뒤, 연합군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받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8월 14일 밤, 쿠데타 주동자들은 근위사단장 모리 다케시(森赳) 중장에게 들이닥쳐 정변에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 하타나카 켄지 소좌와 모리 다케시 근위사단장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하타나카 소좌(왼쪽)는 모리 사단장(오른쪽)으로부터 협조를 얻지 못하자 그를 살해하고 사단장 명령을 위조하여 군을 움직였다. |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
쿠데타 주동자들은 끈질기게 모리 사단장을 채근했다. 그러나 쿠데타에 찬동할 생각이 없었던 모리 사단장은 완고했다. 이 시점에서 이들을 체포하거나 제압하기라도 했다면 좋았겠지만, 쿠데타 세력을 동정했던 모리 사단장은 그저 '말 돌리기'로 시간만 끌었다.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 막으려 상관까지 살해... 급박하게 진행된 쿠데타
그 관대함이 결국 비극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리 사단장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쿠데타 주동자 중 한사람이었던 하타나카 켄지(畑中健二) 소좌는 권총을 뽑아 들고는 그를 쐈다. 사단장과 참모를 현장에서 살해한 그들은, 사단장의 명령을 위조해 근위사단에 출동을 명했다. 8월 15일 새벽은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갔다.
위조명령을 받은 근위사단 병력들은 완전무장을 하고서 궁성의 주요 구획들과 출입구, 항복 방송이 실시될 일본방송협회(NHK)를 점거했다. 쇼와 천황의 육성을 녹음한 항복 선언 레코드를 찾아 쿠데타군은 이곳 저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항복선언 레코드판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쿠데타군 내부에도 균열이 생겼다.
영문도 모르고 동원된 근위사단 병력들은, 처음에는 미군이 상륙해 궁성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을 상상했다가 이내 무엇인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군대가 들어갈 수 없는 구획까지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황궁경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해야 하는 것도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8월 15일 아침이 되자 사단장은 살해됐으며, 출동명령은 위조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병사들은 경악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순식간에 통제력을 잃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주동자들은, 항복선언문이 방송되기 1시간 전에 궁성 앞에서 권총자살했다. 항복을 막기 위해 나섰던 과격파 장교들의 마지막 발악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15년 간 계속돼 온 일본의 전쟁은, 마지막까지 폭력과 피로 점철된 채 그렇게 겨우 끝을 맺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에 벌어진 이 난리의 중심에는, 항상 '천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310만의 국민이 전쟁으로 희생된 시점이었지만, 항복 논의에 있어 국민의 안위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았다. 항복파와 항전파를 막론하고 오직 천황제 유지 가능 여부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웠을 뿐이다.
즉, 천황 한 사람의 존재가 '일억 국민'의 생명보다도 우선된 셈이다. 당시의 제국 일본은 그런 나라였다. 국민의 일본이 아닌, 천황의 일본이었다.
그렇기에, 패전국 일본에게 있어,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에 내포된 '해방'의 의미는 결코 지울 수 없다. 패전으로 새롭게 태어난 나라는, 적어도 천황을 국체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가 아니었다.
▲ 근위사단 소속으로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고쿠보 후쿠지 씨의 증언(2010년) "천황 폐하가 타신 말 앞에서 죽는 것을 명예로 믿었습니다. 소학교 때부터 체화해왔던 충군애국의 마음, 거기에 근위사단에 입대하고부터 받았던, '천황교'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
그러나,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쿠데타까지 불사하던 군부 과격파의 존재는 또다른 의미로 천황의 신화를 덧칠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군에서 독단적으로 전쟁을 계속하려던 상황에서 '천황폐하가 성단을 내려주신' 덕에 겨우 종전이 가능했다는 논리, 바꿔 말하자면 천황의 결단으로 일본 민족이 파멸에서 구원 받았다는 역사관이다.
육해군의 대원수이자 제국 일본의 유일한 주권자였던 천황의 전쟁 책임은 그렇게 희석됐다. 전후 일본을 접수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천황을 문책하지 않고 그 지위를 보장했다. 전쟁의 책임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위시한 군부 독재자들에게만 돌아갔다.
▲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자를 안치하는 시설로, 제국 시대의 천황 우상화와 전시동원에 있어 사상적 충추로 기능하였다. |
ⓒ 박광홍 |
천황이 전쟁 책임을 회피함에 따라, 옛 전쟁에서 일본 국민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강요 받았던 희생을 어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방치돼왔다. 그리고 청산되지 못한 제국의 그늘 아래, 천황을 위한 죽음을 찬미하는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그리고 야스쿠니 같은 국가주의적 장치를 이용해 지지를 구하는 정치세력의 존재는 여전히 건재하다.
제국 체제에서 해방된 일본은, 그렇게 제국의 멍에를 내려놓지 못하게 됐다.
'국체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위한 1945년 제국 지도부의 노력은,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얄궂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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