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올림픽 중계의 부끄러운 초상, 문화대국 한국 맞나

2021. 8. 1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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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하는 한국문화 위상
올림픽 화면은 여전히 국수주의
BTS·태권도는 이미 세계인의 것
인류번영을 주도할 의지는 없나


도쿄 올림픽과 BTS

방탄소년단(BTS)은 일찍부터 해외에서 거의 자생적으로 발생한 세계시민적 팬덤 ‘아미’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사진 빅히트뮤직]

“한국은 오늘날 문화 소프트파워의 공인된 챔피언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가수들과 배우들은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수퍼스타 지위로 치고 올라왔다. 그 기미가 이미 2012년 바이럴한 재미의 ‘강남스타일’에 나타났고 BTS(방탄소년단), Loona(이달의 소녀) 등 K팝 밴드의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공연으로 강화됐으며, 봉준호 ‘기생충’의 전례 없는 오스카 작품상 수상에까지 이르렀다. 미국 다음으로, 불과 5100만 명 인구의 한국만큼 글로벌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나라는 이제 없다는 게 과장된 말이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젊은 문화평론가 제이슨 파라고는 지난해 뉴욕타임스에 영문서적 『1953년 이후의 한국미술』(정연심 외 공저) 서평을 쓰면서 첫머리를 이렇게 풀어놓았다. ‘캬, 국뽕에 취한다’와 ‘에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의 느낌이 교차할 만큼 한국을 문화 대국(大國)으로 묘사했다. 물론 한 사람의 의견에 엄청난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외국인, 특히 영미 평론가의 말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는 한국인의 고질적 습관은 사실 문화적 자존감 부족에서 오는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이니까. 그러나 자타 불문하고 한국을 문화 대국으로 말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은 전례 없는 단계까지 왔으며 상승세라는 사실이다.

한편 경제적으로 봤을 때, 이미 한국은 GDP 기준 세계 10위의 경제 규모를 지녔으며, 지난달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회원 만장일치로 선진국 그룹 지위를 인정받았다. 사실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말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일하는 영어신문 코리아중앙데일리의 에디터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들어왔다. 그런데 그 말은 비난을 동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국은 왜 약소국처럼 행동하나” 비판

MBC의 도쿄 올림픽 개막식 중계 장면. 루마니아를 소개하면서 할리우드 드라큘라 영화 이미지를 넣었다. [사진 MBC 캡처]

10여 년 전에 어떤 미국인 에디터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자 강대국인데도 약소국인 것처럼 굴며 피해의식을 갖고 다른 나라들을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라고 했다. 내가 “한국은 공교롭게도 지정학적으로 더 강대국인 나라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로 인해 과거에 실제로 피해를 보았다”고 대꾸하자, 그는 물었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지 당신 세대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강대국들과의 관계가 그렇다면 한국은 소국이나 개도국에 대해서는 관용적이고 열린 나라인가? 아예 관심이나 있는가?”

그의 말은 역사학자인 임지현 서강대 교수가 최근 새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집대성한 문제의식과 일치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세계 학계에서 주목받은 임 교수의 용어인데, 단순하게 요약하면 ‘우리는 역사상 피해자였으니 우리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정당화된다’는 세습적 집단의식을 말한다. 대부분의 나라에 이런 정서가 있는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은 특히 강한 축에 속한다.

물론 우리는 주변국의 현재진행형 파시즘의 가능성이나 그것을 부추길 과거사 미화 등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함몰돼 강대국에는 선망과 반감이 뒤섞인 자세를, 기타 국가에는 수출 돈벌이 대상이 아니면 무관심을 고수하는 소국(小國)의 마인드를 유지하면 한국은 그동안 성취한 경제·문화적 지위에도 시야와 운신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럼 한국은 과연 어느 정도 대국의 마인드를 가졌을까. 최근 도쿄올림픽 중계와 방탄소년단은 그에 대한 복합적인 지표다.

SBS의 도쿄올림픽 중계 홍보 영상. 한·일대항전도 아닌데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사진 SBS 화면 캡처]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은 한국의 소국 마인드를 여기저기에서 드러냈다. ‘대참사’로 불리며 대표의 사과 기자회견까지 초래한 MBC의 개막식 중계를 보자. MBC는 각국 선수단 입장 때 그 나라를 소개하는 이미지와 문구로 부적절한 자료들을 올렸는데, 우크라이나 선수단 입장 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진을 올리고 아이티 선수단 입장 때 현지 폭동 사진을 올린 것은 이미 전 세계에 악명을 떨쳐서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어이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가장 웃픈 것은 루마니아 선수단이 입장할 때 드라큘라의 이미지를 넣은 것이었다. 드라큘라라는 익숙한 캐릭터로 재미를 주고 싶었다면, 최소한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중세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 블라드 3세의 초상화를 넣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런 성의조차 없이 옛 흑백영화의 드라큘라 이미지를 넣었다. 각국에 대한 얄팍한 정보와 고정된 이미지를 성의 없이 재생산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소국적 무관심과 무지를 드러낸다.

태권도 ‘노골드’ 한국이 남긴 유산

MBC가 워낙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덕분에 SBS의 올림픽 중계는 상대적으로 묻혔지만, 소국의 마인드를 발휘한 측면에서 볼 때 그에 버금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도쿄 올림픽 중계를 예고하는 SBS의 홍보영상에는 아나운서 등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투사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고, 또 다른 영상에는 ‘야인시대’ 김두한 역 배우까지 소환됐다. 세계인이 겨루고 화합하는 축제 올림픽을 홍보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한·일대항전을 홍보하자는 것인가. 게다가 SBS는 개막식에서도 개최국 일본을 빈정거리는 듯한 코멘트를 남발해서 빈축을 샀다. 그에 대해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코리아중앙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다. 더구나 팬데믹이라는 인류의 고된 상황에서 열리는 행사인데, 그냥 축하해주면 안 되나?”

하지만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이 소국 마인드로 일관한 건 아니다. 태권도의 경우를 보자. 태권도가 2000년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이후 최초로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고 대신 금메달 8개를 러시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이탈리아, 태국, 미국, 우즈베키스탄 7개국이 나눠 가졌다. 이것에 대해 한국 언론과 네티즌은 전력 평준화와 메달 다변화로 태권도의 진정한 세계화가 이루어졌다고 쿨하게 평했다.

이것은 대국의 마인드다. 물론 여기에는 ‘유력 서구 언론’ 중 하나인 뉴욕타임스가 태권도야말로 스포츠 약소국들의 희망이며 “K팝 이전에 한국이 수출한 가장 성공적인 문화상품”이라고 말한 영향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문화대국 형성에 기여한 케이팝에 대해서는 한국은 대국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까.

‘국뽕’을 넘어선 BTS의 성취

내가 2019년 가을부터 지난해 여름까지 문화학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영국 런던에 체류할 때, 플랏메이트인 20대 후반의 타이완 출신 대학원생 피비(Phebe)는 방탄소년단의 팬 ‘아미(ARMY)’의 일원이었다. “내가 10년 전에 영국에 와서 힘들고 외로웠을 때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몰라. 게다가 방탄소년단 때문에 영국에서 우리 같은 아시아인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어, 진짜야.”라고 피비는 말했다. 피비의 책장에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추천한 문학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피비는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가사의 대중음악이 지배적이 된 지금, 방탄소년단의 건강한 노랫말이 오히려 얼마나 신선한지도 이야기했다. 그때 내가 실감한 것은 이것이었다. ‘아, 방탄소년단은 이제 정말 한국만의 밴드가 아니구나.’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방탄소년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종종 얄팍하고 협소하지 않은가. “국위선양을 하는 애국청년들” 식의 민족주의·국가주의적 관점이거나 “국가와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매우 수익성 있는 상품” 식의 자본주의 비즈니스적 관점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의 존재는 그 이상이라는 것을, 런던에서 만난 또 다른 아미, 즉 아프리카계 영국인 애시(Ash)와 이야기하면서 알 수 있었다. 애시는 놀랍게도 방탄소년단은 물론 K팝 전체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방탄소년단이 노래에 한국어 가사를 많이 넣는 동시에 ‘Love Yourself’와 같은 경계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세계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높여준다는 인상적인 비평을 했다. 글로벌 팬덤 네트워크인 아미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방탄소년단을 향유하고 지지하는 새로운 방식은 그 자체로 기존의 서구중심적, 일방적 세계화와 다른 대안적 세계화의 기폭제가 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한국 전체의 마인드에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영국에서 코로나19를 비롯한 세계적 이슈들을 겪으면서 실감한 것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는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해도 여전히 서구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반대로 한국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한 채, 그 높아진 세계 위상에도 불구하고 세계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하고 이제 경제·문화 대국으로 여겨지는 이 시점에 한국은 서구와 반목하지 않으면서 서구중심적 글로벌리즘에 대안을 제시할 또 하나의 리더로 가장 맞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필요한 대국의 마인드를 우리는 과연 가졌는가.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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