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전쟁 촉발한 日, 피폭국 근거들어 '피해자 코스프레'

김남중 2021. 8. 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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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640쪽, 3만3000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의 한 공원에 2017년 설치된 위안부 기림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가 서로 손을 잡아 원을 만들고, 이들을 위안부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김학순 할머니가 쳐다보는 형상이다. 임지현 교수는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여성 국제전범재판소’가 위안부 제도를 반인륜적 범죄라고 판결하면서 이 문제가 지구적 기억의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휴머니스트 제공


‘우리 안의 파시즘’ ‘대중독재’ 등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저서들을 발표해온 임지현(62)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겸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소장이 또 하나의 문제작을 내놓았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임 교수가 2007년 동북아시아의 역사 전쟁을 다룬 한 신문 칼럼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식민주의 역사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중·일에 대한 고민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둘러싼 독일 폴란드 이스라엘의 기억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확장되면서 14년간 계속됐다.


임 교수는 희생자의식을 21세기 민족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파악하며 세계적으로 팽창하는 민족주의 현상을 꿰뚫는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한·일 갈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험을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 담론에 정교하게 접합시키며 새로운 시야를 연다.

임 교수가 고안해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란 개념은 자신의 역사를 피해자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현재 자신의 민족주의에 정당성과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서사를 의미한다. 후속 세대는 피해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민족주의를 강화한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이 정확히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부합한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이스라엘과 폴란드가 독일에 대해 갖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놀라운 것은 식민주의나 홀로코스트, 스탈린주의 등에 책임이 있는 국가에서도 희생자의식이 나타난다는 관찰이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의 가해자임에도 미국에 의해 원자폭탄 폭격을 당한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고유성을 바탕으로 피해와 고통을 호소한다. 독일 역시 영·미 공군에 의한 무차별 폭격으로 아름다운 도시 드렌스덴이 완전히 파괴된 사실을 내보이며 나치즘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임 교수는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가해자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포장하자, 폴란드-이스라엘-한국 등의 집단 기억은 세습적 희생자의식으로 무장하고 가해자에게 빼앗긴 희생자의 지위를 재탈환하고자 했다”면서 “가해자는 증발하고 서로 자기가 진정한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희생자들의 세계사”가 펼쳐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민족 담론이 영웅주의에서 희생자의식으로 옮겨가게 된 데는 홀로코스트 인식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0년 1월 스톡홀롬 정상회담 등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이 국제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면서 희생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기억의 중요성이 커졌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그렇듯 각 민족의 희생 서사는 지구적으로 연결됐고 이는 각 국가가 가해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해를 부각하는 기억 만들기에 몰두하도록 이끌었다.

임 교수는 폴란드 독일 이스라엘 한국 일본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아 식민주의,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모하면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귀결되는지 치밀하게 살핀다. 가해국에서는 피해를 강조하면서 가해라는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는 탈역사화가 진행된다. 피해국에서는 피해에 과도한 역사성을 부여하는 과잉역사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희생자가 된 현실은 과거사에 대한 인정과 화해가 왜 그토록 어려운지,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왜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하지만 피해자의식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우선 가해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거나 부인하게 된다. 폴란드는 나치의 가장 큰 희생자라는 공식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41년 폴란드 동부 변경 지역의 예드바브네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이 나치 독일군이 아닌 폴란드 이웃들의 범죄임을 밝힌 책이 출간돼 폴란드인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일본 식민지배의 피해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임 교수는 미국 연구자의 책을 인용해 “종전 이후 길게는 3년까지 한반도에 억류된 일본인은 조선인 미군 소련군 등에게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도 없이 유리걸식하면서 조선인의 복수, 기아와 추위 등에 시달려야 했다. 이 기간의 사망자만 1만8000여명을 헤아렸다”고 전했다.

피해자 집단에는 공범자도 있었고 가해자도 있었다. 가해자 집단에도 희생자는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는 한국의 공식 기억은 일제의 조력자로서 아시아 이웃에게는 가해자였던 조선 병사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과잉화된 희생자의식은 가해의 명분이 될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를 상징 자본으로 삼는 이스라엘의 희생자의식은 중동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했다. 레바논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이스라엘 의회는 “지구 위 어디에도 우리 민족에게 도덕성을 설교할 수 있는 민족은 없다”고 소리쳤다.

임 교수는 피해의 대칭성에 유의하면서도 피해자의식을 성찰할 것을 주문한다. “세습적 희생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성찰이 21세기 문화적 기억의 서사적 틀이 돼야 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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