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고국 돌아온 홍범도 장군

양낙규 2021. 8. 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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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군사전문기자]100년만에 고국 땅을 밟는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독립전쟁의 전설로 불린다. 일본군조차 그를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두려움에 존재였다.

1868년 8월27일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 장군은 구한말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사격실력이 좋았던 그는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타격을 줬다.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홍 장군을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홍 장군이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다. 당시 그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이 바로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의 최초 전투다.

홍 장군의 승리는 이어졌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었다.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 명에 달하지만,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도 가세했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치룬 전투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일본군이 토벌작전에 나서면서 홍 장군은 연해주로 몸을 옮겨야만 했다. 홍 장군은 이후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당시 홍 장군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레닌을 접견했다. 레닌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홍장군에게 건넸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37년 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이후 1943년 10월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 장군은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에 꼽혔지만 소외되어 왔다. 우리 정부는 1962년에 와서야 홍범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나 그 뒤로도 한동안 외면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소련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레닌의 선물까지 받은 인물이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외면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1993∼1994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문제를 제기하며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와 함께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 봉환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것은 지난 2019년 4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당시 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순방 계획을 보고받으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 측에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고, 같은 해 12월 카자흐스탄 측에서 2020년 예정됐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유해 봉환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 계획을 처음 공표했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연기됐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면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을 피해 1921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정확히 100년 만이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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