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졸업 후 첫 상업영화.. '연기 천재'는 시작부터 달랐다

양형석 2021. 8. 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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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묻히긴 아까운 반전 스릴러 영화의 숨은 명작 <프라이멀 피어>

[양형석 기자]

2007년 8월 '아이돌의 명가'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 차게 선보인 9인조 걸그룹 소녀시대가 데뷔했다. 데뷔 전부터 이미 많은 유명세를 타고 있던 소녀시대는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로 두 달 만에 케이블 순위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며 순항했다. 하지만 소녀시대는 정규 1집 발표를 앞두고 암초(?)를 만났다. 소녀시대보다 6개월 먼저 데뷔한 JYP의 5인조 걸그룹 원더걸스가 'Tell Me'라는 노래를 발표해 2007년 하반기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원더걸스의 기세에 밀려 피해를 본 것은 2007년 11월에 발매된 소녀시대의 정규 1집이었다. 리메이크곡 '소녀시대'를 비롯해 'Kissing You', 'Baby Baby'같은 곡들이 들어있는 소녀시대 정규 1집은 신인 걸그룹으로는 상당히 높은 12만 8000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도 원더걸스 열풍에 밀려 '2등 걸그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결국 소녀시대는 원더걸스가 미국진출을 선언하고, 대표곡 'GEE'를 발표한 2009년에야 1인자에 등극할 수 있었다.

가수가 신곡을 발표할 때도 그렇지만 영화가 개봉할 때도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 여러 편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 제작사나 배급사는 물론이고 관객들에게도 썩 좋을 것이 없다. 때로는 충분히 잘 만든 영화가 묻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영화 역사상 손에 꼽히는 반전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프라이멀 피어>가 대표적이다.
 
 <프라이멀 피어>는 <유주얼 서스펙트>보다 더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고도 그만큼의 화제성은 누리지 못했다.
ⓒ UIP 코리아
 
중후한 매력이 돋보이는 할리우드의 영원한 신사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처럼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리처드 기어는 깊이 패인 주름에서조차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멋쟁이 신사다. 메사츄세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리처드 기어는 연기자의 꿈을 품고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연기를 공부해 1973년 뮤지컬 <그리스>의 주인공에 캐스팅됐다. 1980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 <벤트>와 영화 <아메리칸 자골로>에서 동시에 주연을 맡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리처드 기어가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역시 데브라 윙거와 함께 출연한 <사관과 신사>였다. <사관과 신사>로 골든 글러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리처드 기어는 <데드 라인> <커튼 클럽> <노 머시> 등에 출연하다가 1990년 드디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귀여운 여인>을 만났다. 1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귀여운 여인>은 세계적으로 4억 6300만 달러의 엄청난 흥행 수익을 올렸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귀여운 여인> 이후 리처드 기어는 <최종분석> <써머스비> <미스터 존스> <마지막 연인> 등 주로 로맨스가 중심이 되는 영화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러던 1996년 '로맨스 배우' 리처드 기어는 조금 뜻밖의 선택을 했다. TV 드라마 연출자로 유명했던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의 극장 영화 데뷔작 <프라이멀 피어>였다. 천주교 대주교 살인사건의 무료변론을 맡게 된 악덕(?) 변호사 마틴 베일을 연기한 리처드 기어는 특유의 진중한 연기를 선보였다.

리처드 기어의 안정된 연기와 놀라운 반전이 돋보인 <프라이멀 피어>는 세계적으로 1억 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렸다. 안정된 연기에 비해 유난히 상복이 없었던 리처드 기어는 <시카고>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불운을 털었다. <시카고>는 2003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뿐 아니라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 여우주연상(르네 젤위거)을 모두 휩쓸었고 이어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6관왕을 차지했다.

어느덧 70세가 훌쩍 넘는 노배우가 됐지만 리처드 기어는 2016년에도 <뷰티풀 프래디>에 출연해 45세 연하의 다코타 패닝과 뛰어난 연기호흡을 과시했다. 많은 노배우들이 할리우드의 화려한 유혹 속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저지르다가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인 리처드 기어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동료 배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애런을 믿었던 베일과 다중인격을 연기했던 범인
 
 노련한 변호사 베일(왼쪽)은 가상의 인물들을 연기한 10대 소년에게 감쪽 같이 속아 넘어갔다.
ⓒ UIP 코리아
 
<프라이멀 피어>는 대진운이 좋지 않았던 영화다. 불과 8개월 전에 개봉했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유주얼 서스펙트>가 반전 영화의 새 역사를 쓰면서 화려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흥행 성적은 리처드 기어라는 유명배우를 앞세운 <프라이멀 피어>가 더 좋았지만 <유주얼 서스펙트>가 영국과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독식한 반면에 후발주자 <프라이멀 피어>는 그 어느 영화제에서도 각본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범인 찾기가 주제였던 <유주얼 서스펙트>와 '애런 스탬플러(에드워드 노튼 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가 이야기의 핵심인 <프라이멀 피어>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스릴러 영화다. 극을 이끌어 가는 검사 출신 변호사 마틴 베일(리처드 기어 분)은 존경 받던 카톨릭 대주교 살인사건 용의자로 붙잡힌 19세 소년 애런의 무료 변호를 맡게 된다. 그리고 애런의 순진한 표정과 말투에 동화돼 그가 무죄라고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런과 달리 사건 현장의 정황과 증거들은 애런이 범인임을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베일은 애런의 범행 여부를 따지러 간 자리에서 애런의 또 다른 자아인 로이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애런은 자신의 폭력적인 자아인 로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베일은 다중인격에 의한 범행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법정에서 검사 자넷(로라 리니 분)은 계속된 추궁으로 애런의 또 다른 자아 로이를 끄집어내 무죄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놀랍게도 애런은 다중인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애런과 로이라는 인격은 존재하지 않았고 철저히 범인의 연기를 통해 애런과 로이라는 가상의 자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노련한 변호사 베일은 범인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았고 범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의 베일을 바라보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짓는다. 애런과 로이를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의 착하고 선한 인상 때문에 반전이 드러난 후 범인의 음흉한 미소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피고측 변호인과 검사로 법정에서 설전을 벌인 베일과 자넷은 연수원 동기이자 옛 연인 사이로 나온다. 리처드 기어와 로라 리니의 나이 차이가 15살인 점을 고려하면 자넷이 엄청난 영재였거나 베일이 굉장한 만학도인 모양이다. 딱딱한 법정 장면이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지만 재판이 모두 끝난 후 베일의 백허그와 함께 두 사람이 재회할 듯한 달달한 장면도 잠시 연출된다(범죄 스릴러에서 멜로를 끄집어내는 리처드 기어의 능력).

적응기간조차 필요 없었던 연기 천재 
 
 에드워드 노튼은 상업영화 데뷔작 <프라이멀 피어>를 통해 3개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다.
ⓒ UIP 코리아
 
누구나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2008년부터 독일에서만 10년 가까이 활약하던 손흥민도 영국 프리미어리그 이적 후 한 시즌 정도 새 리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배우들 역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경험을 쌓으며 일종의 적응기간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타고난 '연기 천재' 에드워드 노튼에게 그런 기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예일대 졸업 후 뉴욕의 비영리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노튼은 1996년 2000:1의 경쟁률을 뚫고 <프라이멀 피어>에 캐스팅됐다. 상업영화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신들린 연기를 선보인 노튼은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LA 비평가협회상과 시카고 비평가협회상 그리고 골든 글러브의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지금도 <프라이멀 피어>를 에드워드 노튼의 영화라고 기억하는 관객이 적지 않다.

노튼은 이후 우디 앨런(<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과 데이빗 핀처(<파이트 클럽>), 스파이크 리(<25시>) 같은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며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1999년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2008년에는 마블의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를 연기하기도 했다(하지만 마블과의 협상 결렬로 <어벤저스> 합류가 불발됐고 노튼이 하차한 헐크 역은 마크 러팔로에게 돌아갔다).

2015년 <버드맨>을 통해 19년 만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노튼은 2019년 직접 각본과 감독, 제작, 주연을 맡은 <머더리스 브루클린>을 선보였다. 배우뿐 아니라 환경운동가와 자선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노튼은 여러 환경다큐의 내레이션에 참여해 재능기부를 했고 야생동물기구를 지원하기 위한 공익광고에 출연하는 등 무려 26개의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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