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실험해 본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정은 이랬다

이정봉 2021. 8.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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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인간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이세돌은 다섯번 대결해서 한번 이겼고, 이는 인간이 인공지능을 상대로 둔 바둑의 마지막 승리 기록이다.

이즈음부터 인공지능이 미래 대부분의 직업을 대체할 거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2017년 2월 두바이에서 열린 세계정부 정상회담에서 일론 머스크는 “인간이 로봇보다 잘하는 분야는 점점 없어질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으로 내다봤다. 대안으로 머스크는 ‘기본소득’을 언급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가 세기의 바둑 대결을 펼친 이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위협할 것이라는 전망이 널리 퍼졌다. 이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도 세계 곳곳에서 전개됐다. 사진 구글 제공


'기본소득'이란 개념은 예전부터 경제학에서 논의됐다. 하지만 실제로 기본소득 실험이 활발해진 건 2010년대부터다. 2010년대 중반 핀란드ㆍ네덜란드ㆍ스위스ㆍ캐나다 같은 나라와 미국의 일부 도시가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거나 일부 시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도입 의지를 강력히 밝히면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막대한 재원이 드는 정책이라 섣불리 도입을 결정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몇몇 국가가 실험을 시행해 도입 여부를 따졌다. 핀란드, 스페인, 미국 등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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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 차게 시작한 핀란드의 실험

핀란드는 오랜 정치적 논쟁을 거쳐 2017~2018년 2년간 기본소득 실험을 하기로 국회가 합의했다. 200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대규모 경제 실험이라 세계의 많은 정책입안자가 주목했다.

핀란드는 2년간 25~58세 실업자 17만여명 중 2000명을 무작위로 골라 기본소득인 한 달 약 70만원을 지급했다. 실험의 비교를 위해 또 다른 2000명을 추출했다. 이들은 기존대로 실업수당을 받았는데 이 역시 기본소득과 동일한 약 70만원이었다. 두 집단의 차이가 있다면, 실업수당 집단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취업을 하지 않으면 이보다 더 적은 노동 보조금으로 전환되고 취업을 하면 수당을 받지 못하지만, 기본소득은 ‘취직을 해도’ 동일한 액수가 계속 제공된다는 점이었다.

핀란드의 실험은 총 예산 250억원을 들여 진행했지만, 불확실한 성과 속에서 막을 내렸다. 사진은 핀란드 헬싱키의 여유로운 시민들의 모습. 사진 Visit Finland


이 때문에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설계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실업자만 대상으로 하는 데다 두 비교 집단 사이의 차이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 과정에도 문제가 많았다. 기본소득 집단이 복지급여까지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실업수당 집단은 구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수당을 깎는 방식이 실험 도중에 적용됐다.

2년 동안 실험한 결과 두 집단 사이에 고용 효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기본소득 집단은 1년간 평균 고용일이 49.64일이었고, 대조군은 49.25일이었다. 다만 정신적ㆍ신체적 건강과 노동 의욕에서 기본소득 집단이 앞섰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다’는 항목에 기본소득 집단은 58.2%가 긍정했고, 대조군은 46.2%였다. ‘건강하다고 생각한다’는 항목에 대한 긍정 대답은 기본소득 집단이 55.4%, 대조군은 46.2%였다. 전일제 노동 의향을 묻자 기본소득 집단은 68.5%가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지만, 대조군은 58.2%였다.

하지만 이 설문 결과 역시 비판을 받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집단이 이전보다 나아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비교 근거가 없는 반쪽짜리 실험이었다. 핀란드는 당초 실험의 추이를 살펴보면서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결국 예정된 2년을 끝으로 실험을 종료했다. 이건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관련 평가 페이퍼에서 “핀란드는 실업자만을 대상으로 삼아 보편성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며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 실험을 현실적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실험과 혁신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는 데 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갈팡질팡 스페인, 빠르게 확산 중인 미국

스페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서민의 삶이 위협받자 지난해 5월 빈곤층 85만 가구에 매달 60만~14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재난지원금과 유사하게 최저생계비 개념의 기본소득제를 도입한 것이다. 스페인이 서둘러 기본소득에 가까운 급진적 정책을 도입한 건,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나라여서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누적 확진자 100만명을 넘어선 나라다.

기본소득제를 도입했지만, 무리하게 추진한 탓에 파열음이 잇따랐다. 스페인 정부에 따르면 당초 목표한 빈곤층 85만 가구 중 20%에 못 미치는 16만 가구에만 기본소득이 지급됐다. 막상 기본소득을 지급하려고 보니 이들 가구의 소득이나 자산이 예상보다 많아서였다. 기본소득과 기존의 복지 혜택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스페인은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다. 빈곤 문제는 국가를 흔들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진은 지난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좌절감에 빠져 있는 한 남자. AP=연합뉴스


대규모 복지 사업을 행정적 대비도 없이 시도한 스페인과 달리, 미국은 소규모 실험을 도시별로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주 도시 스톡턴은 20대 신임시장 마이클 텁스가 2019년 빈곤층 주민 125명에게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 매달 500달러를 지급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스톡턴은 빈곤율이 18%에 이르는 가난한 도시로 과거 파산을 경험한 적도 있는 곳이다. 스톡턴에서 8개월 뒤 성과를 자체 분석해보니 대부분 주민이 돈을 흥청망청 쓰기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지급되는 돈이 구직 의욕을 떨어뜨리지도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출 항목을 분석해보니, 식료품 구매 40%, 생필품 24%, 공과금 11%, 유류비 9%로 나타났다. 구직단념자도 2%에 불과했다.

스톡턴의 실험이 효과를 드러내자 같은 시도를 하는 도시가 줄을 이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뉴저지 뉴어크, 미시시피 잭슨, 미네소타 세인트폴 등 10개가 넘는 도시가 현재 이와 유사한 기본소득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에서 기본소득은 시 단위를 넘어 주 단위에서도 도입됐다.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지난달 16일 ‘기본소득 보장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프로그램이 시행되면 임신부와 위탁양육 가정을 떠나는 성인에게 매달 500~1000달러의 현금이 지급된다. 마이클 텁스 시장은 “기본소득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연방 정부 차원에서도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이클 텁스 시장은 스탁튼의 빈곤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기본소득 제도를 실험적으로 도입했다. AP=연합뉴스


사실 미국은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기본소득 제도를 운용하는 주 정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알래스카는 1982년부터 지금까지 전 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석유를 판 수입으로 기금을 운용해 주민에게 일종의 배당금을 주는 형식이다. 매년 100만~200만원의 기본소득이 지급된다.


독일의 미래 실험과 기본소득의 미래

기본소득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독일이 사상 최대규모, 최장기 실험을 계획 중이다. 실험은 2023년부터 3년간 진행될 예정으로, 지원자 200만여명 중 무작위 추출한 122명을 대상으로 매달 150만원을 준다. 이들과 비교할 대조 집단은 1378명인데, 실험의 독특한 점은 기본소득 집단과 대조 집단 사이에 ‘통계적 쌍둥이’를 둔다는 점이다. 한 집단에 중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 사는 건강한 28세 여성 택시기사가 있다면 다른 집단에도 이런 조건을 갖춘 ‘도플갱어’를 두고 비교를 진행하는 것이다. 결과 분석도 설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석하는 등 자연과학적 연구방법도 적용한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22일 국회 의원회관 영상회의실에서 화상으로 정책공약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한국에도 기본소득이 도입될까. 뉴스1


이처럼 기본소득만큼 ‘전 국가적으로’ 도입된 곳은 한 곳도 없지만, 그렇게 많은 선진국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제도도 찾기 힘들다. 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본소득과 관련한 온라인매체 기고문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한 나라에서 실험 후에 기본소득 제도가 실제로 도입된 곳은 없고, 제도가 실제 시행되고 있는 곳은 사전에 실험을 거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기본소득의 경우 제도가 도입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책 결정권자의 강력한 정책 의지였다고 평가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기본소득이 도입될까.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의 경제 규모와 행정 처리 능력을 볼 때 기본소득의 도입이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기본소득 분야 석학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에스테르 뒤플로 MIT 교수는 “한국처럼 경제 규모가 크고 발전한 나라는 기본소득보다 선별적 지원이 바람직하다”며 “한국은 언제 어떤 사람을 지원할지 판단할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영상=김지선·정수경·이세영 PD, 김지현·이가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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