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을 잡아줘도 되는데, 눈은 마주치면 안 되는 사이라니
[채희태 기자]
▲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누구나 신념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의 대상은 신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다. 또는 경험이나 배움의 과정에서 굳어진 하나의 생각일 수도 있다.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인 신념은 때때로 인간을 매우 강한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신념이 약하면 그저 하나의 견해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신념이 강하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필연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결과일까? 신념은 오롯이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일까? 영화 <모가디슈>를 보며 국가로부터 부여된 신념이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모가디슈>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남북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이 함께 탈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모 신문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내전 소말리아에서 꽃 핀 동지애, 남북 공관원 합동 탈출 작전"이라는 기사로 다루기도 했었다. 그리고 영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깊숙한 주제는 '분단'이다.
'분단'은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주제였다. 그래서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던져준 충격이 적지 않았다. <쉬리>가 전통적인 영화의 주제인 사랑에 분단을 살짝 가미했다면 이듬해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분단을 철학의 문제로 접근했다. <쉬리>에서 북한은 테러를 일삼는 악한 존재였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모가디슈>를 보며 <공동경비구역 JSA>가 떠올랐던 이유는 판문점에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로 장소만 이동했을 뿐 두 영화가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분단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88 올림픽을 치른 후 UN에 가입하려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사정과 UN에서 가장 가장 많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내전이 발발한 소말리아는 영화의 주제와 소재를 연결하는 개연성이다.
현실도 전쟁만큼 잔혹하다
우리가 SF 영화를 아무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영웅들의 상대는 악당이고, 악당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이분법적 설정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낯선듯, 낯 설지 않은 소말리아 내전 상황은 SF 영화에서처럼 영웅이 악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총을 들고 싸우는 장면에선 경험하지 않았던 광주 민주화 항쟁이, 지랄탄이 떨어지는 장면에선 직접 경험했던 대학 시절 가투가 떠올랐다. 그리고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안기부 출신 참사관 강대진(조인성 분)을 통해 소말리아 내전이 진정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잔혹하다. 총칼이 보이지 않을 뿐, 현실 또한 잔혹하다. 총칼이 보여 전쟁이 더 잔혹한지, 총칼이 보이지 않아 현실이 더 잔혹한지 알 수 없다. 전쟁은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서 잔혹하고, 현실은 잘난 이성이 만든 결과라서 잔혹하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현실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죽는 사람이 보편적으로 훨씬 더 많다. 어쩌면 현실은 현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쟁 같은 잔혹함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총칼은 권력을 상징한다.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총을 겨눌 수 있는 것은, 거리와 상점을 불태우며 물건을 탈취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해 맘껏 총질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총칼은 그 누구에게도 일방적으로 쥐어주어선 안 된다. 전쟁이 아닌 현실에서도.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통해 돌고돌아 나를 향할지도 모를 그 총칼을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쥐어준다.
<모가디슈>의 신파 콘트롤
우리에게 분단이라는 주제는 얼마든지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수도꼭지다. <모가디슈>는 분단을 주제로 다루면서 신파에 의존하지 않는다. 류승완 감독은 분단이라는 주제를 돌직구처럼 관객들에게 던지기 위해 과감하게 신파를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빠르고 사실적으로 영화를 전개해 나갔다. 인간의 눈물은 양가성이 있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인 동시에 책임을 피하는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는 간편하게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물로 공감함으로써 관객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극장을 나온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모가디슈>를 보며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온 북한 대사관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한국 대사의 옆지기(김소진 분)는 깻잎을 젓가락으로 집지만 두 장이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던 북한 여성은 젓가락으로 밑에 있는 깻잎을 잡아 주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 사소한 장면에 분단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함의를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적의 도움을 받아 깻잎을 먹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일까, 아닐까? 분단은 어쩌면 과거에는 대단했지만, 지금은 사소해진 어떤 신념의 관성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념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과거의 신념을 지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은 과연 진실일까? 과거엔 진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현재에도 여전히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신념이라는 녀석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는 '욕심'과 '양심'을 헷갈리지 말라고 했다. 혹시 우리는 단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여잡고 있는 신념을 '가치'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신념을 잠시 접어두고 서로 손을 맞잡는다. 마침내 탈출해 성공해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한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은 공항에 남한의 안기부와 북한의 보위부가 마중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여기서 작별 인사를 나누자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잠시 접어 두었던 신념을 다시 장착해야 할 시간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사선을 함께 넘어온 남과 북의 대사관 식구들은 비행기 안에서 조촐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비행기에서 내려 데면데면 각각 남과 북에서 준비한 차에 올라탄다. 차에 오르기 직전 북한 대사 허준호와 남한 대사 김윤석은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로 눈인사라도 하고 싶은 '사소한' 욕망을 억누른 채 이내 차에 오른다.
우리의 후손들은 분단을, 그리고 통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서로 깻잎 먹는 것은 도와줄 수 있지만,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는 이상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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