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금-축전에 생색, 김연경 인터뷰는 누굴 위한 것이었나
[양형석 기자]
"좋은 인터뷰어(질문을 하는 사람)는 인터뷰이(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답변을 끌어 내는 것이 아닌 듣고 싶었던 답변을 끄집어내는 사람이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강사 이름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십 수년 전에 '좋은 인터뷰'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을 때 강사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 기회가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항상 새기고 다니는 말 중 하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달성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9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거리두기 4단계 기간임에도 공항에는 여자배구 대표팀의 귀국을 반기기 위한 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몰렸고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공항에서 주장 김연경의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인물은 대한배구협회 홍보부위원장으로 V리그에서 경기 감독관을 맡으며 배구 팬들에게도 익숙한 유애자 감독관이었다. 유 감독관은 현역 은퇴 후 1992년부터 1999년까지 KBS에서 배구 리포터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었지만 이날 인터뷰에서는 김연경은 물론 듣고 있는 배구 팬들까지 민망해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김연경이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후 코트를 떠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한국 여자배구는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되찾았다. 하지만 '한국 여자배구가 20년 만에 아시아 최강 자리를 되찾았다'고 자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당시 한국이 자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집중한 반면에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배구강국들은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여자 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아시안게임에 2진 선수들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논란은 대회가 끝난 후에 있었다. 배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낸 후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진 것이다. 당시 터키 리그에서 활약하던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에이스 김연경은 '김치찌개 회식'을 마친 후 선수들을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사비로 2차 회식을 열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대한배구협회는 대표팀 선수들과 배구 팬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당시의 미안함이 컸던 탓일까.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이 8강에서 세계 4위 터키를 꺾고 4강에 진출하자 '포상금 잔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배구를 관장하는 대한배구협회가 2억, V리그를 주최하는 한국배구연맹이 2억 원의 포상금을 전달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 9일 대한배구협회의 공식후원사인 신한금융그룹이 2억 원의 포상금을 쾌척하면서 총 6억 원의 포상금이 모인 것이다.
물론 현재 여자배구 대표 선수들은 대부분 소속팀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스타 선수들이다. 주장은 지난 5월 중국리그의 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와 좋은 조건에 계약을 맺었고 양효진(현대건설 힐스테이트)은 무려 7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연봉과 상관없이 올림픽에서의 선전으로 추가적인 보너스를 수령한다면 올림픽을 위해 땀 흘린 선수들에게는 더 없이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하지만 6억 원의 보너스를 이끌어낸 대한배구협회는 많은 언론과 배구 팬들이 모여 있는 귀국 현장이 선수들에게 생색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것일까. 대한배구협회는 평소에도 가장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어야 할 포상금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꺼내며 배구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환영식에서 여자 배구 대표팀 김연경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1.8.9 |
ⓒ 연합뉴스 |
사회를 맡은 유애자 감독관은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인터뷰에 나선 주장 김연경에게 초반부터 무례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김연경의 입으로 이번에 여자배구 대표팀이 받게 될 포상금의 액수를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만들고, 포상금의 출처인 대한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 그리고 후원사와 수장의 이름들을 한 명씩 열거하면서 김연경에게 감사인사를 요구했다.
김연경으로부터 협회와 연맹, 후원사에 대한 감사 인사를 받아내며 목적(?)을 달성한 유 감독관은 다음 질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언급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이 메달을 딸 때마다 축전을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여자배구가 지난 8일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르비아에게 패해 4위가 결정된 후에도 축전을 보내 선수들을 격려했다(문재인 대통령은 수영 남자 자유형 100m에서 아시아 기록을 세운 황선우에게도 축전을 보낸 바 있다).
메달을 따내지 못했음에도 대통령의 축전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라는 뜻이었을까. 유애자 감독관은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라고 했고 김연경은 여자배구에 관심을 보내준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유애자 감독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고 강요(?)했고 김연경은 "했잖아요 지금"이라며 상황을 유쾌하게 넘겼다.
물론 유 감독관이 개인의 지나친 충성심으로 후배 선수인 김연경에게 감사인사를 강요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 귀국 인터뷰는 높으신 분들을 향한 인사 강요로 점철되며 피곤한 선수들의 아까운 시간만 빼앗고 말았다.
여자배구 선수들은 리그 도중 많은 인터뷰와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생각보다 인터뷰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비 시즌 기간 동안 지상파 예능에 자주 출연하며 대중들과 충분한 교류를 하고 있는 김연경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배구계 선배를 앞세워 인사나 강요하는 비생산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느니 차라리 사회자 없이 짧은 인사로 올림픽 기간 동안 성원해준 배구 팬들과 국민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게 훨씬 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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