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내·며느리 벗어던진 그녀들, 황선홍도 감탄했다
[양민영 기자]
▲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문이 열리면 여성이 나타난다. 시청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 여성이 어떤 모습인지에 쏠린다.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날씬할까.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여성은 '변신'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는 자신 있다는 듯 환히 웃고 요란한 박수와 찬사가 쏟아진다. 이게 우리가 아는 여성과 문에 관한 드라마이며 가장 오래되고도 익숙한 방송의 문법이다.
SBS 인기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역시 여성과 문에 관한 드라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문이 열리면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직접 문을 두드린다. 골을 넣기 위해서라면 사나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축구를 모르던 여성이 선수로 변신한다. 기존의 미디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법이 탄생한 셈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보기 전에는 반신반의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축구하는 여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보여줄 것인가? 여성의 플레이를 '몸 개그'라고 조롱하다가 결국에는 여성을 가르치는 남성 전문가가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나서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의심만 하기에는 시청자 반응이 심상찮았다. 특히 여성 시청자의 호응이 대단했다. 뒤늦게나마 정주행해보니 과연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나도 덩달아서 공을 차고 싶다.
처음 축구를 배워 보겠다고 집을 나서던 날 무더위에도 마음이 설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초보자 클래스라지만 공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모르는 내가 축구를 할 수 있을까? 약속 장소에 모인 인원은 스무 명쯤이었는데 축구를 배우겠다고 이렇게 많은 여성이 모인 것도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패스, 슛, 협응력 향상을 위한 기초 훈련, 미니게임까지 마치고 나서 뼈아픈 사실을 깨달았다.
'축구를 하려면 내 몸부터 마음대로 움직여야 하는구나!'
볼을 어떻게 다루나 걱정했는데, 몸이 먼저고 그 다음이 볼 컨트롤이었다. 그런데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공 하나로 몇 시간씩 뛰어놀던 남자들과 달리 우리는 공으로 놀아본 적도, 공 다루는 법을 배워본 적도 없다. 불편한 교복 치마를 입고 다리를 오므려라, 팔자로 걷지 마라, 단속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그래서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공을 차봤고, 내 실력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 못한다는 걸. 헛발질에 넘어지기는 기본이고 공을 어디로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아니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기본기도 없으면서 공만 쫓는 모습이 누구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조롱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와중에도 축구가 재미있었다는 거다.
처음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면서도 축구보다 여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들 중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을 처음 차는 초보이고 평균 연령도 낮지 않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 기초적인 룰을 몰라서 저지른 반칙, 팀에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은 축구 초보인 여성을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법한, 예상 가능한 연출이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서툴고 좌충우돌하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익으면 그 다음엔 축구가 보인다. 다치기까지 한 출연자는 꼭 한번 이겨보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고(지난 설 연휴에 특집으로 열린 경기에서 패배한 한혜진씨는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다음 경기가 언제냐고 물었다) 모두가 서서히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조혜련, 박선영, 신효범씨처럼 아이들의 엄마, 왕년의 인기 스타로나 조명받던 이들이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이 얼마나 신선한가. 특히 배우 박선영은 내가 축구 클래스에서 봤던 한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가끔 우왕좌왕하는 초보자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이가 있다. 본능적으로 볼을 가슴으로 받는다든지, 공과 한 몸처럼 움직이며 턴을 한다든지, 습득 속도가 빠르고 저돌적인 공격성까지 갖춰서 모두를 놀라게 한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배웠다면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도록 박선영의 움직임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치열하고 진지한 여성의 모습을 TV로 본 게 얼마 만인가. 보통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은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무엇에 도전하더라도 다이어트나 성형을 통한 메이크오버 위주이고 대체로 소소한 취미에 몰두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전부였다.
▲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그러나 <골 때리는 그녀들>의 출연진은 선수로서, 축구팀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울고 웃거나 사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기고 싶은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며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린다. 더 나아가서 팀의 일원으로서 끈끈한 동료애까지 발휘한다.
이 새로운 드라마는 이들이 초보의 열정을 발산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맞는다. 모르니까 더 알고 싶고, 몰라서 무작정 좋아하는 마음은 이제 막 입문한 초심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축구의 황금기를 누렸던, 각 팀의 감독(황선홍, 이천수, 이영표 선수)조차 잊고 지냈던 아마추어 시절의 열정이 다시 떠올랐다고 했을까. 이 드라마가 어디로 흘러갈지, 끝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드디어 방송계도 새로운 문법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개그우먼으로 구성된 팀인 개벤저스의 주장 신봉선이 토너먼트 탈락 이후에 한 말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스스로 '이 좋은 것'을 알아버렸다. '이 좋은 것'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갈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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