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文정부 기대도 없었다..盧정신 가장 배반한건 문재인"
대선은 정치판의 가장 큰 장(場)이다. 정치인이라면 이런 대목을 놓칠 수 없다. 유력 주자에 줄을 대거나 캠프에 몸을 싣는 게 상식이다. 그래야 또 5년을 보장받지 않겠나. 현역 배지도 아닌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라고 딱히 다른 사정은 없을 터. 더구나 그는 보수 유력 주자인 윤석열-최재형 캠프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미 두 후보와 각각 독대도 했다. 근데 그는 현재 캠프행보다 저술 마무리에 집중하고 있다. 곧 출간될 책은 『국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다:자유주의와 사회안전망을 위한 혁명』이다. 국가주의를 줄곧 비판해 온 김 전 위원장의 시각이 좀 더 구체화한 느낌이다. 그래도 "이 시국에 책이라니 너무 한가한 거 아닌가요?"라며 슬쩍 딴지를 걸었더니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겁니다"라는 알듯말듯한 답이 돌아왔다. 김 전 위원장은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하는 등 여야를 넘나든 정책가로 꼽힌다. 그에게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차기 대통령의 과제는 무엇일까. 인터뷰는 8일 오전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에서 두시간 가량 진행됐다.
Q : 책 제목이 꽤 길다. 국가, 즉 정부가 엉뚱한 곳에 자원을 쓴다는 얘기인가.
A : "그렇다. 시장이나 공동체(시민사회)가 해도 될 일엔 국가가 개입하고, 실제로 국가가 해야 할 사회 안전망 구축에는 미흡하다는 거다. 복지, 교육, 인력양성 등 사회비 지출(social spending)이 북유럽 국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0%를 넘기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20%가량이다. 우리나라는 낮게 잡으면 12%, 높게 잡아도 15%에 불과하다."
Q : 문재인 정부는 복지를 확대하지 않았나.
A : "정반대다. 현 정부는 복지제도의 파괴자다. 복지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해서 시스템에 의해 복지비를 지급하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매표성 지출을 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하면 정부가 생색낼 수 없지 않은가. 시스템으로 복지체계가 돌아가면 관료 비용이 줄어들고, 부당한 정치권력의 개입도 적어지는데 현 정부는 그걸 역행했다. 사회비 지출이 건강한 사회를 지속하려는 필수적인 행위가 아닌, 그저 '퍼주기에 불과하다'라는 인상을 남겼다."
Q : 여권 유력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기본소득을 역설한다.
A : "아직 이 지사가 말하고자 하는 기본소득이 뭔지 잘 모르겠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관장하는 국가 보조금이 300개 이상이다. 수혜자는 자신이 수혜 대상인지도 잘 모른다. 이 지사의 기본소득이 현행 보조금에 새로 더 얹어주자는 것인지, 아니면 보조금을 통폐합한 상태에서 새로운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Q : 그럼 책은 복지시스템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진단인가.
A : "근본적인 건 진보와 보수 진영에 대한 이야기다. 성장담론 없는 진보는 사이비 진보이며, 분배담론 없는 보수는 사이비 보수라는 거다."
Q : 진보는 분배를 중시하고, 보수는 성장을 중시하는데 지금 주장은 반대다. 왜 그런가.
A : "성장이 없으면 인류는 퇴보한다. 진보도 성장을 고민하지 않은 게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성장을 걱정했다. 문재인 정부도 성장담론으로 제시한 게 소득주도성장 아닌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득주도성장은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을 차용한 거다. 케인스학파에서 파생된 임금주도성장은 내수 시장이 크고, 자영업자 비율이 전체 고용인력의 6.5%에 불과한 미국에선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수출 중심에 자영업자의 비율이 25%에 이른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영세 자영업자까지 포함하면 27~28%라는 게 정설이다. 최저임금을 높이면 이들에게 돈을 줘야 하는 자영업자가 더 어려워진다. 현 정부 들어 숱하게 봐온 '을들의 전쟁'이 벌어진 이유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진보는 산업구조에 대해 무지하다."
Q : 보수에겐 왜 분배가 중요한가.
A :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유가 위협받는다. 양극화는 사회 갈등의 제1 요소다. 분배는 시장에 의한 1차 분배와 국가에 의한 2차 분배로 나뉜다. 특히 한국 사회는 1차 분배 구조가 크게 왜곡돼 있다.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교수는 억대 연봉인데, 계약직 교수는 4000만원 안팎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계약직 교수의 노동시간은 훨씬 길다. 대기업-하청기업 갑을관계, 서울-지방 양극화도 비슷하다. 그저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자산(부동산)이 폭등하는 세상이다.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 대한민국처럼 1차 분배 구조가 뒤틀린 나라는 없다. 북한과 대치하는 와중에도 한국에서 좌파가 클 수 있었던 배경이다."
Q : 비정규직 문제엔 노조도 관련이 있지 않나.
A : "맞다.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재벌과 귀족노조의 합작품이다. 국가는 이를 방조했다. 사회 곳곳의 양극화는 87년 체제 이후 심화했다. 과거엔 군사정권 시절엔 사회 안정 차원에서 국가가 자원 배분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 때만 해도 새마을 운동이나 의료보험 실시 등으로 국가 권력이 불평등 해소에 일조했다. 지금은 국가 권력이 그렇게 작동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조건 시장에 맡기지 말고 이같은 1차 분배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Q : 시장 분배를 개선한다면 보수가 집권할 수 있는가.
A : "1차 분배는 기본이다. 이미 세계 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돌입했다. 시장에서 배제되는 인구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퇴직한 고령층,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청년층, 아예 구직 포기를 하는 사람들…. 이들을 방치하면 사회불안은 커지고 자유주의 체제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 의한 2차 분배에도 보수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인터뷰는 한국의 진보-보수 진영에 대한 얘기로 흘러가면서 자연히 내년 대선 구도와 인물로 넘어갔다.
Q :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따로 만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A : "최 전 원장은 언론에 보도된 거 말고 별도로 한번 더 만났다. 기본 자질은 두 분 모두 충분히 갖고 계신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법조인은 개별 케이스를 검토하고, 과거 사안을 따지는 이들 아닌가. 반면 정치란 미래를 구상하고 끌고 나가는 분야다. 그런 방향으로 빨리 전환되길 기대한다. 윤 전 총장은 거침없이 말하는 걸 보면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학습이 일정부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몇가지 설화가 있지만, 여권의 공세인 경우가 많다. 특히 '불량식품' 논란은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자유주의자라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대목이다. 그걸 '가난한 이들은 불량식품만 먹으란 말이냐'고 공세를 취할 때 반격에 나서야 하는데 캠프에서 그런 역량이 부족한 거 같다. '막말 프레임'에 물러서지 말고 제대로 논박할 수 있어야 한다."
Q : 윤 전 총장은 이준석 대표와 신경전 양상인데.
A : "야당은 죽기 살기로 혁신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과연 수권 능력이 있는가. 2018년 지방선거 참패 이후 당 지도부의 면면을 보라. 김병준 비대위원장, 황교안 대표,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사실상 모두 외부 수혈이다. 현재 유력한 대선 후보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당은 실력을 쌓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천착하고 생산물을 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표 계산만 하고, 언론에 어떻게 노출되는지만 신경 써선 안 된다. 부패한 인사가 주요 포스트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 청년정치가 낡은 폐습을 따라가선 안 되지 않겠는가."
Q : 내년 대선의 화두는 무엇인가.
A : "공정과 정의다. SNS 시대란 결국 언어의 시대다. 누구나 말을 한다. 불합리한 요소가 있으면 조용히 넘어가지 않는다. 이미 사회적으론 공정과 정의가 보편적 원리로 자리 잡았다. 지금 젊은이들은 과자 하나를 사 먹으면서도 환경을 염두에 둔다. 원주민 박해 이력이 있는 커피 회사의 제품은 거부한다. 그만큼 기업에도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만 달라진 세상을 모른다. '대깨문'이나 태극기부대 등 1차 강성 지지층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1차 지지층은 유튜브에 심취하고 댓글을 보면서 이기고 지는 것에만 매몰돼 있다. 그건 가짜 정치다. 진짜 정치는 일반 대중의 요구를 끌어안고, 때로는 힘겨운 사정을 털어놓으며 미래를 향해 같이 걸어가야 한다."
Q : 9개월가량 임기가 남은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자면.
A : "어차피 기대가 없었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못하더라. 내가 그쪽 사람들 잘 알지 않나. 새로운 시대를 끌어갈 인물도 새로운 담론도 없었다. 무엇보다 성장의 모티브를 놓쳤다는 게 안타깝다. 한국인의 위대한 열정을 뻗어 나가게 하지 않고, 서로 편을 갈라 스스로 갉아먹게 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개혁해야 할 분야는 노동, 교육, 산업구조, 금융시장 등이다. 어느 것 하나 손대기 어렵다. 대통령이 이 중 하나라도 개혁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엉뚱하게 검찰개혁, 언론개혁이라며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개혁이란 말을 이토록 오염시킬 수 있나."
Q : 최근 여권에선 "함부로 '노무현 정신'을 운운하지 마라"고 한다.
A : "그 사람들 불러서 내 앞에서 노무현 정신이 뭔지 강의 좀 하라고 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에 나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 '교수님, 나는 말입니다. 정치로 세상 진짜 좀 바꾸고 싶어요. 우리 엄마들, 애가 밖에서 싸움하고 들어오면 붙들고서 '그러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잖아요. 그게 맞는 겁니까. 엄마가 자식한테 비겁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이 맞는 거냐고요. 이런 세상이 싫어요' 그런 간단한 부분에서 출발하는 게 노무현 정신이다. 대연정과 지방 분권 등 권한을 내려놓은 게 노무현이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한미 FTA를 추진하고, 제주 강정기지를 설립하고, 이라크 파병을 한 게 노무현이다. 그때 극렬하게 반대했던 이들이 이제 와 노무현을 붙잡고 있으니 실소가 난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노무현 정신을 가장 배반한 사람 아닌가."
최민우 정치에디터, 최지혜 인턴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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