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간첩
신문이 경칭을 생략하는 부류가 몇 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처럼 대중과 친숙해 경칭이 오히려 어색한 유명인들이 한 묶음을 차지한다. 그 대척점에 서 있을 법한 또 다른 부류가 간첩이다.
어린 시절 간첩, 다시 말해 북한 간첩은 미디어 속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수사반장’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대공수사 드라마 ‘113 수사본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간첩 잡는 똘이장군’ 따위의 반공 만화영화 역시 생생한 교보재였다. 독침과 난수표, 비트(은신처)로 대표되는 간첩의 전형적 이미지 역시 이런 영상물이 심어줬다.
살과 피, 이념을 가진 실체적 존재로 간첩을 인식했던 건 좀 더 자란 뒤의 일이었다.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주역인 할머니 간첩 이선실,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 교수로 위장했던 지식인 간첩 정수일,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의 주범이었던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등은 분명한 실체들이었다. 기자가 되고 검찰을 출입하면서 간첩과의 거리는 한 발 더 좁혀졌다. ‘북한공산집단은 국가를 참칭하고…’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수백 페이지짜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영장과 공소장들은 들여다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섬뜩하게 했다.
물론 그게 모두 진실은 아니었다.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기 쉽다는 이유로 멀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가까이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경우처럼 권력의 필요나 무리한 수사에 의해 누구나 쉽게 간첩으로 조작될 수 있었다. 권력과 야합해 자신이 살해한 부인을 북한 공작원으로 둔갑시켰던 일명 ‘수지김 사건’의 주범 윤태식은 공안 조작의 추악한 진실을 보여준 산증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사자료에는 만만치 않은 양의 진실이 담겨 있었고, 그 겉봉에 명시된 피의자들이 대부분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 요소였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나브로 잊혀가던 간첩 혐의자들이 오랜만에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공포가 아니라 측은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현실감각 빵점의 시대착오적 인식과 행보,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왕따’ 취급을 받았다는 전언이 소외와 생활고의 짠내를 느끼게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수준의 ‘휴민트’에 기대서라도 정보 비슷한 걸 구걸해야 하는 북한의 처지도 참 딱해 보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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