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주한미군 철수" 오후엔 통신선 끊었다
"미군이 정세 악화의 화근" 언급 뒤
남북연락사무소·군 통신선 두절
북, 잇단 강경압박에도 청와대 침묵
훈련 중단 넘어 미군 철수 요구
향후 대미·대남협상서 거론 가능성
통신선 복구·불통 반복하며 심리전
박지원 일주일 전 "SLBM 쏠 수도"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의 사전 훈련을 시작한 10일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 요구한 데 이어 군 통신선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채널을 통한 정기 통화에 응답하지 않았다. 한·미가 사실상 연합훈련을 시작한 데 대해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김여정(사진)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이날 담화에서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며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한 조선반도 정세를 주기적으로 악화시키는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미 군 당국은 이날 하반기 연합훈련의 사전 훈련 격인 위기관리참모훈련(CMST)에 돌입했다. 김 부부장의 ‘미군이 화근’ 담화는 이 같은 연합훈련 일정에 맞춰 대남 위협을 하면서 나왔다. 북한이 그간 각종 선전매체나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 보고서(지난해 6월 25일) 등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김 부부장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건 처음이다.
특히 김 부부장은 이날 “위임에 따라 발표한다”고 밝혀 담화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임을 분명히 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구에 나선 뒤 문재인 정부를 향해 내놓을 청구서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 요구까지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향후 북한이 한·미를 향해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의 내용으로 대북 제재 해제 이외에도 주한미군 철수를 전면에 내걸 가능성을 열어놨다.
김 부부장은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자멸적인 행동”이라며 “거듭되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미국과 남조선 측의 위험한 전쟁 연습은 반드시 스스로를 더욱 엄중한 안보 위협에 직면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군사적 도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앞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3일 국회 정보위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하면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발사하는 등의 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여정 “한·미 전쟁연습, 안보위협 직면할 것” 도발 시사
조동호(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그간 비공개로 진행된 협상에서 북·미 관계 개선, 대북 제재 해제, 미군 철수 등을 주장했다”며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은 건 정기적으로 열리는 연합훈련을 원천 봉쇄하려는 시도이자 남북 또는 북·미 협상이 열릴 경우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겠다는 예고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한·미 군사동맹 해체를 뜻하는 만큼 향후 비핵화 협상에 난제가 추가됐다. 한·미 군사동맹의 핵심은 주한미군이 한국 방어의 인계철선인 동시에 동북아에서 중국·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는 이런 동북아 질서를 허물자는 것으로, 최소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대남 적화통일 포기를 전제로 해야 하는 요구사항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침략 무력 철거’를 공개 요구한 만큼 향후 문재인 정부의 대응 여하에 따라선 한·미 동맹의 균열 논란으로 번질 수도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남·남 갈등의 불쏘시개 중 하나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후 5시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마감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와 관련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도 “동해지구와 서해지구 군 통신선에서 오후 4시 정기통화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며 “기술적인 문제 때문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11일 오전 개시 통화를 시도하며 북한의 의도를 확인할 방침이다.
북한의 통화 불응은 이날 오전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연합훈련 실시를 비판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한 뒤 발생했다. 당초 북한은 이날 오전엔 군 통신선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채널을 통한 개시 통화에 응했다.
북한은 지난해 6월 국내 일부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이유로 남북 통신선을 차단한 뒤 413일 만인 지난달 27일 통신선 복원에 합의했다. 당시 남북은 동시 발표를 통해 “남북 정상 간의 합의에 따라 통신선을 복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이 통신선 연결 14일 만에 이를 차단함에 따라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하는 방법까지를 포함한 대남 압박술을 사전에 준비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 일정을 염두에 두고 통신선을 복구한 뒤 다시 차단해 역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은 남북 관계에 대한 불만 차원에서 관계를 경색시킬 때나 복원에 나설 때 통신선을 신호탄으로 활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특히 남은 임기 10개월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있는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북한은 통신선 복구와 불통을 반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심리전을 구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북한의 ‘통신선 복구 이후’ 전략을 간과한 채 북한의 통신선 복구 호응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통신선 연결을 발표할 당시 한·미는 연합훈련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북한의 연이은 한·미 연합훈련 비난과 남북 통신선 무응답에도 청와대는 침묵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0일 “지난 1일 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북측의 기존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담화의 의도, 앞으로의 북한 대응 등에 대해 현 시점에서 예단하지 않고 북한의 태도 등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면서도 청와대의 구체적 입장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담화의 성격이 중차대하다고 판단하고 문 대통령에게 담화의 내용과 의미 등을 직접 보고했다고 한다. 야권에선 청와대의 소극적 대응에 대해 “북한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정용수·강태화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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