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세상은 끝났다! 2020 도쿄 올림픽의 빛나는 '4등'들 ①

라효진 2021. 8. 1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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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지만 잘 싸웠다! 여자 배구팀·높이뛰기 우상혁
Unsplash

그 동안 한국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식에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동북아시아의 빈국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메달 강박이 있었던 게 사실이죠. 은메달을 따고도 귀국길에 고개를 숙이던 선수들의 모습은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백점 만점의 시험에서 99점 짜리 시험지는 휴지 조각이라고 여기던 것이 올림픽을 대하는 한국의 자세였음을 부인하기 어렵죠.

그런데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이 모든 양상이 놀랄 만큼 뒤집혔습니다. 한국의 메달밭으로 여겨졌던 종목에서 '부진'했고, 동메달 결정전까지 가서 '아쉽게' 4등에 머무른 선수들도 적지 않았는데요. 이제 국민들은 메달의 색깔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며,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고 있어요. 특히나 이번 올림픽에서는 한국 팀과 선수들이 '4등'이란 결과를 많이 냈습니다. 하지만 '비메달'에 대한 타박은 없었습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종목에서 갑자기 4등이란 성과를 낸 선수들을 향한 격려도 있었겠지만, 좀 더 올림픽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한국에는 생긴 듯합니다.

영화 '4등'에는 실력은 있지만 노력은 하지 않는 올림픽 수영 유망주 광수(정가람, 박해준)가 나옵니다. '애매한 4등'을 하는 광수에게 박감독(유재명)은 더 달리라며 채찍질을 하죠. 이를 못 견디고 태릉을 박차고 나와 수영 코치가 된 광수는 또 다른 4등, 준호(유재상)를 만납니다. 광수는 박감독의 채찍을 그대로 준호에게 휘두릅니다. 자신은 그렇게도 치를 떨었던 채찍질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준호는 광수로부터, 박감독으로부터,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산처럼 대물림된 그 채찍질의 연쇄를 끊습니다. 도쿄 올림픽은 '너 잘 되라고'라는 미명으로 내리쳐 오던 그 채찍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을 성숙하게 만든, 도쿄 올림픽에서 빛난 '4등'들을 만나 보시죠.

인스타그램 @olympic
「 여자 배구 」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이후 첫 메달에 도전했습니다. 세계의 배구 강호들 속에서 다소 부족한 전력에도 메달이란 목표를 세울 수 있었던 건 세계 여자 배구 랭킹 1위 김연경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김연경은 도쿄 올림픽을 국가대표 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갖은 배구계 내홍에도 팀을 다독여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거의 매 경기 5세트까지 이어지는 접전에 선수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오로지 투지로 연승 행진을 계속하던 여자 배구팀은 4강전에서 브라질에게 발목을 잡혔습니다. 동메달 결정전에선 세르비아에 패하며 4위로 올림픽을 마쳤죠. 이후 주장 김연경은 "동메달 결정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슬펐다"라며 "경기 전날 팀 미팅을 갖고 상대 전력을 분석했는데 세르비아에 안 될 것이란 걸 어느 정도 직감했다. (현실을 접한) 선수들이 오열했다"라는 뒷얘기를 전했는데요.

한 수 위의 강호들을 극적으로 격파한 통쾌함은 여자 배구팀이 국민에게 선사한 짜릿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늘 머리 위에 드리운 패배의 기운에도 내색하지 않고 '최선의 플레이'를 보여 줬다는 점은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네요.

「 높이뛰기 우상혁 」

도쿄 올림픽을 통해 단박에 한국 육상 신기록을 경신한 국군체육부대 소속 우상혁. 짧게 깎은 '군인 머리'에 '칼각' 거수 경례까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5를 넘으며 '세계 4위'에 등극했습니다. 한국 육상은 아직 트랙&필드 메달을 따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상혁의 성적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1997년 이진택이 세웠던 높이뛰기 2m34 기록을 깨기도 했고요.

우상혁의 '4등'이 더 주목받은 건 그의 긍정적 에너지 덕분입니다. 자신이 뛸 차례가 되자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다"를 크게 외친 그는 3위 선수와 단 2cm의 기록 차이로 동메달을 놓쳤습니다. 현재 군 복무 중인 그가 메달을 따면 조기 전역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우상혁은 병역 특례보다는 '행복한 경기'에 만족했습니다.

그의 '핵인싸' 면모도 올림픽을 관람하는 이들에겐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 남아 남자 100m 결승 경기를 직관하는가 하면, 세계 각국의 선수들과 우정을 나누기도 했죠. 그는 후에 "매우 행복하고 즐겁게 뛰었다"라며 "선수촌에 돌아온 뒤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데, 아직도 꿈 같다"라고 말했는데요.

우상혁이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은 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였습니다. 당시엔 예민해서 선수촌 방에만 있었다는 그는 "나중에 돌아보니 사진도 없고 추억도 없더라. 전 세계 대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왔다는 점에서 후회스럽고 창피했다"라며 이번 대회에선 올림픽을 즐기자는 생각으로 임해 긴장감을 떨쳤다고 털어놨어요. 역시 즐기는 자를 이길 순 없다는 옛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올림픽 4등처럼 아쉽게 실패를 겪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부탁한다'라는 말에 이렇게 답했어요. "도전과 도전 속에 긍정을 싣고 간다면 실패를 쿨하게 떨쳐 버린다면 다시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저도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요. (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의 종언, 2020 도쿄 올림픽의 빛나는 '4등'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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