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투르크설'이 중국 동북공정의 대항마?

송호림 2021. 8.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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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민족이 투르크였다고? ①]

[송호림 기자]

▲ 아프라시얍의 고구려 사신도  우즈베키스탄의 민족정체성은 참으로 복잡하다. 고대 사마르칸드의 거주민은 대다수 소그드인이었으며 이들은 유목민도, 투르크도 아니었다. 하지만 투르크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우즈베키스탄은 아프라시얍을 그들 조상이 남긴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소개한다. 오늘날에도 사마르칸드에 사는 대다수 주민들은 우즈벡인이 아닌 타직인들이지만 우즈벡 당국은 사마르칸드를 '우즈벡 최고의 역사문화유산'으로 소개한다.
ⓒ KOREA.NET
뭐라고? 한민족의 조상이 '투르크'라고?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얍 벽화. 이 벽화에 그려진 2명의 사신은 고대 한반도에서 널리 유행한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허리엔 역시 고구려 무사들이 즐겨 쓰던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그림 속 두 인물을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보낸 특사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던 역대 한국 정치인들도 고려인을 제외하면 접점이 거의 없는 양국 관계에 '아프라시얍'이란 외교적 윤활유를 덧바르곤 했다.

하지만 '아프라시얍'은 유목 투르크가 아닌 정주 소그드인의 흔적이다. 현대 우즈벡 민족의 조상 가운데 소그드인도 물론 포함되지만 아무래도 투르크 정체성에 비해선 그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재야사학계를 중심으로 고대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57~935)가 투르크계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는 '신라왕족의 뿌리가 흉노에 있다'는 일부 역사 기록에 근거한다.

우즈벡을 비롯한 대부분 투르크계 국가들은 투르크 이전에 존재한 내륙아시아의 유목집단인 흉노를 그들의 직계조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민족 역사 1000년을 머금은 신라가 흉노의 후예라면 한국과 우즈벡은 '아프라시얍'이라는 모호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진정 피를 나눈 형제국이 될 일이다.

특히 이같은 주장이 유튜브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신라 투르크설'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방어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필자 역시 투르크계 언어인 위구르 및 우즈벡어를 전공하면서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진 참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양측의 신화 그리고 언어적 유사성을 차례대로 분석해봤다. 그리고 이를 두 편의 기사를 통해 독자들과 공유한다.

"고대 한반도를 투르크인이 지배했다고?"

일부 학자들은 삼국시대(B.C.1~A.D.7) 널리 쓰인 몇몇 단어들이 투르크어와 유사하단 점을 들어 고대 한반도 전체를 투르크인이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신라어에서는 각간(角干)이라는 관직명이 투르크어 '카간(qaghan)'에서 유래했다는 설. 고구려의 초대 도읍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이 투르크어로 북극성을 의미하는 '촐판(cholpan)'과 발음상 동일하다는 설. 북한 두만강(豆滿江)의 명칭이 숫자 1만을 의미하는 투르크어 '투만(tuman)'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은 이의 주요 근거로 활용된다.
 
▲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쉬가르 신시장 부근의 투만 강  필자가 2007년 여름 처음으로 카쉬가르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투만 강의 풍경이다. 카쉬가르 역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침입을 받았고, 그 몽골인이 세운 차가타이 한국과 모굴 한국은 거의 500년간 이 지역을 다스렸다. 따라서 이 강의 이름도 몽골인이 붙였을 확률이 높다. 다만 필자가 십수 명의 카쉬가르 사람들에게 물어도 이 지명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 송호림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서로 인접한 언어문화권 사이의 관직명, 지명, 방위명(東西南北) 등은 얼마든 교차될 수 있다. 또한 각간과 카간, 두 명칭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였으며 사용된 시기 역시 상이하다. 게다가 투르크어 문화권에서 행정기관 혹은 단체의 수장(首長)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라흐바르(رهبر)' '라이스(رئیس)' 같은 명칭도 원래는 아랍-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서로 일부 어휘가 비슷하다고 두 민족이 동일한 뿌리를 지녔다고 볼 수 없다.
  
졸본성이나 투만 같은 지명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와 투르크는 교류가 왕성했으므로 투르크어 어휘는 얼마든지 고구려 지명에 사용될 수 있다. 투만이라는 지명 역시 사실 투르크어만이 아닌 몽골어에도 존재한다. 두만강은 실제 고대가 아닌 고려 중기 몽골군의 침략 이후부터 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중앙아의 투르크어는 아랍-페르시아어 범벅이다  필자가 번역 중인 근대 차가타이어 사료의 첫 문장이다. 차가타이어는 현대 우즈벡어와 위구르어의 모태어로, 한국의 중세국어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문장을 현대 우즈벡어로 치환하면 다음과 같다. "Chunki janob javhar-e shamshir-e shijoat, quvvat-e bozuv-e shahomat, ya’ni Abulfath Mulla Ali Quli Amir-e Lashkar shahid marhum ibtido-e tulu’-e oftob davlatlaridan to g‘urub-e mohcha, umr va iqbollarigacha, davlat oso mulozim..." 이 문장 안에 순수 투르크어 어휘와 문법요소는 단 5%에 그치고 나머지 95% 는 모두 아랍-페르시아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즈벡, 위구르인이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과 뿌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송호림
 
'신라왕족 투르크설'의 사료적 근거는?

사실 신라가 투르크계라는 주장은 신라 30대왕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선조가 흉노족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기원전 86)라는 내용의 비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김일제라는 인물은 전한시대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학계는 두 갈래로 나뉜 상태다. 우선 문무왕이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유구한 역사의 흉노 김씨에서 그들의 시조를 꾸며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반면 문무왕의 시조가 흉노라는 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도 적지 않다. 실제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은 김일제는 훗날 중국 산둥반도에 세워진 투국(秺國)의 제후로 봉해졌으며, 이 투국의 수도는 신라왕국의 수도와 동일한 명칭인 금성(金城)으로 불렸다. 
 
▲ 금장한국(金帳汗國) : altun orda  러시아인들은 그들을 정복한 투르크-몽골인들을 향해 Золотая Орда, 즉 '황금텐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자의 金은 투르크 세계에서는 황금(altun)이나 금속(temur)을 의미한다. 따라서 러시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나라에서도 제련술에 능한 흉노인에게 특징적인 성씨를 부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김씨 성을 하사받은 흉노인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을 금성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 송호림
 
물론 흉노가 투르크의 직접적 조상인지는 또 다른 논쟁거리다. 흉노와 고대 투르크는 모두 유목민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중국사료에도 돌궐을 대체로 흉노의 후예로 기술하고 있지만, 문자가 뚜렷이 남아 있는 고대 투르크어와 달리 흉노어는 어떤 문자를 사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 몽골에서 발견된 탐가 문자가 흉노에서 사용됐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다만 우리는 흉노를 제쳐 두고도 신라와 투르크의 종족적 유사성을 간접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신라는 건국초기에 박씨가 280여 년 통치했고 그 다음에는 석씨가 172년, 마지막으로는 김씨가 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 가운데 흉노로 추정되는 일가는 김씨가 유일하다. 따라서 김씨 이전에 왕위를 차지했던 박씨와 석씨에 대해서도 그 원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신라의 시조는 유목민이 아니었다

고대민족의 뿌리를 읽기 위해서는 그의 시조탄생설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가 설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설화 속 내러티브 요소들을 통해 해당 민족이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기원했는지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 신라건국의 주역인 박씨 일가의 신화를 엿보면, 그들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탄생에 '우물'이 주된 배경요소임을 알 수 있다.

고대 한반도 역사의 최중요 사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시 신라 시조가 우물에서 탄생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신라인들에게 우물은 일종의 성역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유목민은 보통 우물이 아닌 유목지 부근의 샘이나 하천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빈도가 높다. 따라서 투르크인의 다양한 시조설화에도 우물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있지도 않다. 초목이 무성하고 수량이 풍부한 중앙아 초원지대에서는 유목민에게 인공우물의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던 까닭이다. 
 
▲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부에 위치한 나랏 대초원의 모습  필자는 신장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수량이 풍부한 초원지대인 신장 북부에는 백만이 넘는 카자흐인들이 살아도 물이 부족한 건조지대인 남부로 갈수록 카자흐인 만나기가 힘들진다는 것이다. 즉 유목민에게 목축에 부적합한 땅은 애초에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송호림
 
투르크인들이 본격적으로 우물을 사용한 시기는 그들이 서진(西進)하면서 토하리스탄과 소그디아나를 정복하고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8~9세기부터다. 이후 킵착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투르크인은 이동식 텐트가 아닌 밀집형 주택에 거주하는 정주민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유목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됐는데, 이의 대표적 사례가 현대 우즈벡과 위구르족이다.
  
반면 신라에서 우물이란 단순한 설화 속 배경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 수차례 발굴된 신라의 왕궁 우물터는 식수를 퍼 올리는 용도가 아닌 희생물을 바치는 제단으로 기능했음이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당시 건설된 첨성대 역시 그 구조상 별자리 관측소가 아닌 천지(天地)를 잇는 우물을 형상화한 지성소(至聖所)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신라시대 소그드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점 그리고 삼국 가운데 흔치 않는 여왕이 존재했다는 점을 들어 신라인의 시조가 이난나 여신을 숭배하던 소그드인 지파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박씨 이후 172년 동안 신라를 지배한 석씨 일가 역시 그 시조설화를 보면 해로(海路)를 통해 한반도로 건너온 외부세력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박씨와 석씨는 모두 흉노와는 관련 없는 비유목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신라건국 이후 뒤늦게 권력을 장악한 김씨만이 흉노일 '가능성'만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박씨와 석씨의 통치기간을 모두 합해도 김씨에 미치지 못하므로 이제 다른 수단을 활용해 신라의 종족적 정체성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다음 기사 <신라인은 정말 '투르크어'를 썼을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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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알림잔(송호림)은 東西 투르키스탄의 근현대사와 고전 차가타이어를 연구하는 독립적인 아마추어 사학자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중앙아시아 문제를 단편적으로 바라보며 실제와 다르게 소개하는 경향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 거주하며 페이스북에 '중앙아시아 연구회(Central Asia Research Group of Korea)' 모임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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