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째 깨지지 않는 기록, 할리우드도 인정한 아우라

양형석 2021. 8. 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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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역대 비영어권 영화 북미 흥행 1위 <와호장룡>

[양형석 기자]

모든 나라 사람들이 마찬가지지만 미국인들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다. 미국 내 야구리그 결승전을 오만하게 '월드시리즈'라고 부를 정도.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올림픽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오다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에게 덜미를 잡혔다. 당시 르브론 제임스와 앨런 아이버슨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NBA 스타들은 동메달을 목에 건 시상대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영화 쪽에서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 더욱 크다. 할리우드라는 세계 최고의 시장을 보유했기 때문에 외국 영화, 특히 비 영어권 나라의 영화에 대해선 다소 심할 정도로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시네마천국>이 1200만 달러, 개봉 당시 중화권을 완전히 평정했던 주성치의 <쿵푸허슬>이 1700만 달러 흥행에 그쳤을 정도. 작년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그래서 더욱 큰 이변으로 꼽혔다. 

하지만 화려한 볼거리와 세련된 영상미에 눈을 빼앗기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도 액션배우들이 총출동한 장예모 감독의 <영웅>이나 성룡, 이연걸 등이 출연한 액션 영화들은 까다로운 북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최고의 정점을 찍은 영화는 따로 있다. 무려 21년째 깨지지 않고 있는 '비영어권 영화 북미 흥행 1위 기록(1억2800만 달러,박스오피스 모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다.
 
 북미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와호장룡>은 국내에서는 서울관객 23만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할리우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장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의 대형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 받는 아시아 출신 감독이다. 1975년 타이완 국제 예술대학을 졸업한 이안 감독은 미국으로 이주해 일리노아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1993년에 만든 <결혼피로연>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4년 <음식남녀>를 끝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이안 감독은 1995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연출했다. 엠마 톰슨과 케이트 윈슬렛, 휴 그랜트 등이 출연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골든 글러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휩쓸며 이안 감독의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이후 <아이스 스톰>, <라이드 위드 데블> 등을 연출하며 성공한 아시아 감독으로 활동하던 이안 감독은 2000년 무협 영화 <와호장룡>을 선보였다.

주윤발과 양자경, 장쯔이 등 중화권 인기 배우들을 캐스팅한 이안 감독은 영화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중국어 대사를 고집했다. 북미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지 모를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미국 관객들은 이안 감독이 선보인 동양 무술의 아름다움에 매료됐고 <와호장룡>은 북미에서 1억28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비영어권 흥행 1위 기록이다(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덤).

<와호장룡> 이후 할리우드에서 완전히 인정 받은 이안 감독은 2002년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슈퍼히어로 <헐크>를 그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2005년에는 이안 감독 또 하나의 역작으로 꼽히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골든 글러브, 아카데미 영화제를 비롯해 무려 7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더불어 제이크 질렌할과 고 히스 레저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했다). 

2006년 탕웨이의 출세작 <색,계>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또 한 번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이안 감독은 2012년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2016년 이라크 전쟁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빌리 린스 롱 하프타임 워크>를 선보인 이안 감독은 2019년 윌 스미스를 내세운 <제미니맨>을 연출했지만 다른 대표작들에 비하면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피 튀는 칼싸움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중화권 스타였던 장쯔이는 <와호장룡>을 통해 월드스타로 거듭났다.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주로 잔잔한 드라마 장르에서 강세를 보이던 이안 감독은 <와호장룡>을 통해 웅장하고 아름다운 무협 액션을 완성했다. <와호장룡>이 무협 액션 장르가 낯선 서양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비결은 역시 또 한 명의 거장 원화평 무술감독의 역할이 컸다. 과거 <취권>과 <사형도수>를 연출하며 성룡이라는 액션스타를 발굴하기도 했던 원화평 무술감독은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와 <킬빌>에서도 무술 감독을 맡았다.

<와호장룡>에서 보이는 액션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권의 호쾌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공중으로 점프해 기와를 밟을 때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물에 떨어질 때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효과음을 최대한 자제했기 때문에 호쾌한 느낌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와호장룡>의 액션에는 진정한 무림 고수들에게서 풍기는 묘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영화 중반부, 사이가 틀어진 수련(양자경 분)과 교룡(장쯔이 분)이 수련의 집 마당에서 맞대결을 벌이는 장면과 이모백(주윤발 분)과 교룡의 대나무숲 액션은 <와호장룡>의 백미다. 주윤발은 80년대부터 수 많은 액션 영화를 찍었고 <예스마담> 시리즈로 유명한 양자경 역시 액션에 특화된 배우다. 하지만 <와호장룡>이 개봉할 당시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장쯔이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액션 연기는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400년된 청명검을 향한 이모백과 교룡, 푸른 여우(정패패 분)의 갈등과 화해가 <와호장룡>의 주요 스토리지만 이모백과 수련의 러브 라인도 <와호장룡>의 재미요소다. 무당파 동문 관계로 평소엔 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두 사람은 이모백이 푸른 여우의 독침을 맞으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특히 죽음을 앞둔 이모백이 "마지막 숨을 이용해 말할게, 당신을 사랑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무협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뜬금없지만 애틋한 러브신이다.

이모백과 수련의 사랑이 중년(?)의 절제된 감정이었다면 혈기왕성한 교룡과 소호(장첸 분)의 사랑은 조금 더 도발적이고 즉흥적이다. 마적단 두목 소호는 도적질을 하던 도중 교룡에게 반해 그녀의 빗을 훔치고 푸른 여우에게 수련을 받아 무술에 자신이 있던 교룡은 말을 타고 소호를 쫓는다. 처음엔 원수로 시작했지만 선남선녀는 금방 눈이 맞아 버린다. 

장쯔이의 마음을 홀린 마적단 두목
 
 터프한 마적단 두목을 연기한 장첸은 브라운 아이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국내에서도 얼굴을 알렸다.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와호장룡>에서 교룡은 옥대인의 딸로 (실제로는 푸른 여우에게 수련을 받았지만)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사막을 지나다가 교룡이 타던 마차가 마적의 습격을 받고 거기서 마적단 두목 소호를 만나게 된다. 소호는 아직 무공이 완숙하지 못했던 교룡과 밀당을 하다가 배고픔에 지쳐 쓰러진 교룡에게 음식과 목욕물을 제공하며 유혹한다. 교룡과 소호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남자답고 쿨한 방식으로 교룡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호를 연기한 배우는 대만 출신의 배우 장첸이다. 1997년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를 통해 이름을 알린 장첸은 <해피투게더>에서 고 장국영, 양조위 등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와호장룡>에서 커플연기를 했던 장쯔이와는 2004년 <2046>을 통해 재회했고 같은 해 왕가위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에서는 공리와 연기호흡을 맞췄다.

장첸은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배우다. 2001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1년>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이듬 해 <점점>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당시엔 뮤직비디오에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붓던 시기였다). 2007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숨>에 출연했고 2013년 <적도>에서는 지진희,  최시원과 연기했다.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시리즈에서는 손권 역을 맡기도 했다(물론 <적벽대전>은 한국과 관련된 영화는 아니다).

크지 않은 분량이지만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푸른 여우 역의 정패패는 홍콩 무협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와호장룡>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대나무숲 액션 장면은 1969년 호금전 감독의 <협녀>를 오마주한 것인데 정패패는 호금전 감독과 1965년 <대취협>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푸른 여우는 <와호장룡>에서 주인공 이모백과 그의 사부 강남학을 모두 죽인 최종보스로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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