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지는대로, 이끌리는대로 즐기시라

임세정 2021. 8. 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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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느끼는 전시 '비욘더로드' 연출
스티븐 도비·콜린 나이팅게일에게 듣다
실감 몰입형 전시회 ‘비욘더로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여의도 더현대 6층 알트원 갤러리에서 지난달 21일 스티븐 도비(왼쪽)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콜린 나이팅게일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전시장 입구에 들어선 순간 강렬한 보라색 조명에 먼저 시선이 사로잡힌다. 곧 귓가에 커다란 일렉트로닉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조명 색은 빠르게 변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에 압도되면서 우선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첫 번째 방엔 핑크색 조명이 비치고, 구석에 설치된 오래된 TV에 노이즈 화면이 나왔다. TV 앞엔 흰 의자도 놓여있었다. ‘앉아서 TV를 보라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엉거주춤 서있었다. 빨간색 조명이 켜진 다른 방에는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향수병으로 만든 조형물이 전시돼 있었다. 마스크 속으로 향기가 스며들었다.

복도처럼 생긴 방으로 들어가자 좌우 벽에 화면이 설치돼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같은 영상물이 재생됐고 화면 속 인물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또 다른 방에선 애니매트로닉스(사람 등의 모습을 본떠 만든 움직이는 로봇) 조각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동시에 플래시 효과가 나타났다.

복도를 따라가니 어두컴컴한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음악도 어두워졌다. 어디선가 연기가 흘러나왔다.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푸른 빛이 비치는 벽에 그래피티 아트가 빼곡했다. 이 구간을 지나니 나무로 만든 집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의 음악이 들리고, 정면에는 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비디오아트가 보였다. 예배당처럼 의자도 놓여있었다.

이 모든 공간은 하나로 연결돼 있지만 각각의 공간은 모두 다른 시각, 청각, 후각 등의 요소로 디자인 됐다. 음악과 조명이 고조되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안정되는 구간이 있다. 신기하게도 공간에 따라 감정도 계속 바뀌었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 6층 알트원(ALT.1)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머시브(immersive) 전시 ‘비욘더로드’의 미디어 프리뷰를 지난달 21일 다녀왔다. 이머시브란 관객 몰입형 전시·공연을 의미한다.

‘비욘더로드’는 영국 유명 뮤지션 제임스 라벨이 만든 음악에 조명과 영상물, 시각효과, 조형물, 향기 등을 더해 대규모 설치 미술을 구현한 것이다. 관객들은 총 33개의 방에서 오감으로 예술을 체험한다. 전시의 제목은 라벨의 앨범명 ‘더 로드’에서 따왔다.

전시를 연출한 스티븐 도비(43)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콜린 나이팅게일(47)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를 갤러리에서 만났다. 도비와 나이팅게일은 이머시브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영국의 극단 펀치드렁크에서 지난 20년간 이 장르를 연구해 왔다. 펀치드링크는 미국 뉴욕에서 진행한 ‘슬립 노 모어’라는 이머시브 공연을 통해 유명해졌다.

나이팅게일은 “일반적인 전시회에는 작품이 걸려있는 곳이 있고 관객은 그 위치로 찾아가야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전시에선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모든 감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경험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면서 “음악을 기반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렇게 예술을 섞고 활용하는 방식은 예술가인 내게도 자연스러운 자기 표현법으로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사진=윤성호 기자


두 사람은 2019년 제임스 라벨과 손잡고 프로젝트를 시작해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개최했다. 서울 전시는 세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다. 콘텐츠 제작사 미쓰잭슨의 박주영 대표가 런던 전시회를 본 뒤 감명을 받아 한국 전시를 추진하게 됐다.

서울 전시에서 특별히 활용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호랑이와 까치다. 도비는 “폴리 모건이라는 컨템포러리 아티스트와 한국 전래동화를 찾아보게 됐다”면서 “까치와 호랑이가 전래동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이 전시의 연결고리를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이비 존슨이라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수로 만든 호랑이 작품을 갤러리에 전시했다. 모건은 이 전시가 영국에서 가져온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 그리고 여러 음악을 샘플링하는 뮤지션 라벨의 이미지를 연관지어 까치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래피티 아트를 위해선 우리나라 아티스트인 나나를 섭외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 전시에선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작업했지만 한국 전시에선 한국 아티스트가 참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나나와 작업하면서 그만의 특별한 에너지와 한국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다소 익숙치 않은 그래피티 장르를 갤러리라는 공간으로 가지고 들어오면서 또 다른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전시에는 대니 보일과 알폰소 쿠아론 등의 영화감독을 비롯해 향수 디자이너, 사진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기존의 작품을 편집해서 활용한 것도 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전시장 안에 없다. 전시를 모두 체험한 뒤 출구 앞에 가야 앨범 ‘더 로드’의 사운드트랙 제목과 설명을 볼 수 있다.

나이팅게일은 “갤러리 안에 여러 작품이 전시돼 있지만 전시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본다. 그런데 작품 하나하나에 제목과 설명을 붙이면 관객들이 전시를 하나의 작품으로 느끼는 데 방해가 된다”고 의도를 밝혔다. 그러면서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들이 감사하게도 우리 의도에 맞는 이런 방식으로 전시하도록 허락했다”고 말했다.

도비는 “관객들은 정말 개인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맞는 방법도 틀린 방법도 없고, 꼭 느껴야만 하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서 “오감이 갑자기 너무 자극되는 게 익숙치 않아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그 관객에게는 진실한 느낌이며, 그 순간 잠시 앉아 여유있게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볼 수도 있고 다른 방으로 갈 수 있는 선택이 주어진다”고 말했다.

‘비욘더로드’의 국내 전시는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여전한 가운데 열리게 됐다. 팬데믹 탓에 전시 준비 과정엔 어려움도 있었다. 도비는 “코로나19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모든 걸 어렵게 했다”면서 “특히 작품들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데이비드 니콜슨이란 아티스트가 런던 전시에 냈던 작품과 다른 작품을 제작해 여기에 전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그가 독일 베를린에 있었다”면서 “코로나19 때문에 작업 장소로 이동하지 못해서 제작 기간이 길어졌고, 결국 그 작품은 이 전시장에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와 함께 실감콘텐츠, 이머시브 장르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콘서트 현장에 가지 않고 음악과 영상을 즐기는 방식, 영상기술과 오감을 활용한 몰입형 전시 등이 그 예다.

나이팅게일은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 이전에 시작됐지만 기획 의도와 시대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전시에 대해 논의하다가 팬데믹이 시작됐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이 전시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확신이 없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 공간만큼은 그것과 분리된 영적이고 거룩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두 아티스트에게 이번 한국 방문에 대한 소감을 들어봤다. 도비는 “한국에 처음 와봤는데 첫 2주는 자가격리 기간이었고, 자가격리가 풀리자 갤러리에 격리됐다”면서 “우리가 서울에서 가장 중요하게 경험한 건 전시 준비를 같이 했던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들의 열정과 추진력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에 좋은 전시를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이팅게일은 “코로나가 사그라들었을 때 다시 서울에 와서 일하고 싶다”면서 “같이 일한 팀과 아주 좋은 경험을 했고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머시브라는 다소 생소한 예술 장르를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뭔지도 물어봤다. 나이팅게일은 “예술은 대화라고 굳게 믿는다”면서 “일상과는 다른 한 박자 느린 공간에서 음악, 조명, 예술품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비는 “마음을 열고 호기심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내가 느끼는 게 옳은지 그른지 걱정하지 말고 느껴지는대로 이끌리는대로 움직이고 즐기시라”고 조언했다.

누군가는 10분 안에 관람을 끝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제한 시간인 2시간 동안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 느끼는 모든 것이 진심인 전시회다. 관람은 11월 28일까지.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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