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보다 중요한 게 관심·사랑.. '선한 사마리아인' 돼줄 것"
“예쁜 방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TV에 나오는 근사한 집을 볼 때마다 너무 부러웠거든요. 제 방이 생긴다면 핑크색으로 꾸밀 거예요.”
현지(가명·10)는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하면서 열없는 미소를 지었다. 위, 아래로 각각 두 살 터울의 언니, 남동생이 있는 현지는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뷔를 좋아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열 살 소녀였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찾아간 현지의 집은 또래 친구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남루하고 누추했다. 현지가 무슨 이유에서 “예쁜 방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당엔 잡초가 무성했고 곳곳에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현지 아버지의 문패는 현관의 더러운 신발들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상황’은 더 심각했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가구들, 곳곳에 쌓인 먼지, 걸레처럼 보이는 수건, 퀴퀴한 냄새…. 도대체 현지네 가족에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현지의 집은 인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전북 익산의 한 농촌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할머니(79)만이 거실에 앉아 취재진을 맞았다. 할머니를 통해 현지네 가족이 걸어온 신산했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간추리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현지네 부모님이 백년가약을 맺은 건 13년 전이었다. 현지의 아빠는 한국인이고 엄마는 필리핀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엄마는 집을 나가버릴 때가 많았다. 돈도 함부로 썼다. 결국 6년 전쯤 현지네 아빠와 엄마는 법적으로 갈라섰다. 문제는 엄마가 빚을 약 1억원이나 남겨놓고 가족을 떠나버렸다는 것. 아빠는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댔다. 할머니도 농사일을 해서 번 돈을 가계에 보탰다.
그러나 이 정도 수입으로는 빚을 갚기가 힘들었다. 삼 남매를 건사하기도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할머니는 4~5년 전쯤 심각한 허리 통증을 느꼈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할머니는 “허리뼈가 틀어지고 목 디스크까지 심해져서 대문까지 걸어 나가는 것도 힘들다. 몇 년 전 시술을 받았지만 나아진 게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할머니가 도움이 시급하다고 요청한 부분은 주거 환경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50년 전에 지어진 집은 너무 낡아서 취재진이 보기에도 수리가 필요한 데가 수두룩했다. 할머니는 “50년 동안 도배는 두세 번 정도만 한 것 같다”고 했다.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외에도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삼 남매의 막내인 현수(가명·8)만 하더라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증세가 심각했다. 현수는 시종일관 동문서답을 했고 가끔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망의 터널을 걸어오면서도 할머니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신앙의 힘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집 인근에 있는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직분은 권사였다. 할머니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지 못했다면 손주들 기르는 일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힘든 건 아픈 허리 때문에 새벽기도를 하러 교회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항상 같은 내용입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거죠. 손주들이 누군가한테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됐으면 하는 게 제 소원이에요.”
현지네 가족 방문은 국민일보와 월드비전이 함께하는 ‘밀알의 기적’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현장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호남특별연회 감독이자 익산영생교회 담임목사인 박용호(67) 목사와 이 교회 조병진(65) 장로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이불과 학용품이 담긴 선물을 전달했는데, 할머니는 “선물도 좋지만 손주들을 위해 목사님이 기도 좀 많이 해 달라”고 간청했다.
박 목사는 아이들 손을 잡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이 너희들에게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이런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들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현지네 집을 방문한 뒤 익산영생교회에서 박 목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밀알의 기적 캠페인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참여하니 생각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게 관심과 사랑입니다. 국민일보와 월드비전, 익산영생교회와 기감 호남특별연회 같은 조직이 함께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캠페인 이름처럼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교회 성도들과 나눔을 실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운동’을 하고 있는데 현지네 가족을 돕는 일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익산=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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