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레즈비언 커플의 과감한 로맨스가 준 감동

김상목 2021. 8. 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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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우리, 둘>

[김상목 기자]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_퀴어 로맨스 물의 전형을 비트는 설정, 신선하다

퀴어 로맨스 물은 그들의 사랑이 금기시되거나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겪는 난관을 기본 클리셰로 흔히 이야기가 진행된다. 선녀선남의 전형 같은 이들이 알고 보니 퀴어였다거나, 평범한 여남이 어느 계기로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고난을 치르는 과정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마련이다. 당사자로는 청소년이거나 2030 세대가 주로 묘사된다.

하지만 <우리, 둘>은 황혼기에 접어든 은퇴 여성 두 사람의 지독한 사랑을 주제로 삼는다. 둘은 이미 거의 20년 가까이 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동일한 형태의 집을 마주보며 지낸다. 주위 사람들조차 이들의 관계를 알지 못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보는 집과 복도로 구성된 건물 한 층은 그녀들만의 완벽한 세계로 기능해 왔다. 영화 시작과 함께 이미 커플의 사랑은 완성형인 상태다.

니나는 대외적으로는 독신으로 평생을 보냈고, 마도는 사별한 남편과 사이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다. 둘은 겉으로는 친한 이웃으로 행세하며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니나는 주변에 거리낄 게 없지만 마도는 자녀들에게 아직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영화의 줄거리가 본격 전개되기 전까지는 그럼에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니나와 마도는 현재 살고 있는 파리를 떠나 로마로 옮겨 노년을 보내는 구상에 돌입한다. 둘은 이참에 '커밍아웃'을 결의한 상태다. 하지만 마도는 타이밍을 놓치고 가족들에게 발표하기를 망설이게 된다. 둘은 그 때문에 언쟁을 벌이고 마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를 몰아붙여 병세를 키웠다며 한탄한다. 지고지순한 사랑과 후회의 풍경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녀들을 이어주던 집과 복도라는 소우주에는 이제 마도의 딸 앤과 그녀가 고용한 간병인 뮤리엘이 끼어든다. 사실상 거리낄 게 없이 동거생활을 즐겨온 니나는 졸지에 마도와 생이별하게 됐다. 이제 복도와 마도의 집 현관은 단절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니나로서는 서로의 관계를 증명할 방도가 없다 보니 매일 마도를 보러 갈 수 없게 됐다. 

2_로맨스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로, 다시 로맨스로 롤러코스터
 
▲ "우리, 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로맨스와 스릴러를 왕복하기 시작한다. 한편에선 마도를 향한 니나의 애절한 순애보가 펼쳐지고, 다른 한편으론 니나의 집착이 온갖 부작용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니나는 연인과의 단절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터라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대로 자기중심적인 폭주를 시작한다. 니나는 물론이거니와, 마도도 (말도 못하고 거동도 제대로 못하지만)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둘 사이를 훼방 놓는 (물론 그 대상이 되는 이들로선 꿈에도 생각 못한 날벼락을 맞는 셈이다) 모든 존재를 적대시한다.

주변 신경 쓸 바 아닌 니나에 비해 마도의 주변은 복잡하다. 두 자녀는 마도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어머니 마도에 대한 입장차도 큰 편이다. 다만, 딸과 아들은 그 오래된 모부 간 악연 때문에 니나의 존재를 포용할 여유라곤 없는 상태란 점에선 상황이 일치한다. 사랑하는 이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던 니나의 위태롭던 모험이 마도의 딸 앤에 의해 탄로 나면서 둘은 오작교가 생기기 전 직녀와 견우 신세가 되고 만다. 

3_주인공 커플에게 온전히 응원을 보내기 어렵다

영화를 본 뒤 떠오르는 생각 중 고민지점이 둘 있다. 첫 번째는 자기 맡은 일을 하려다 봉변을 당하는 간병인 뮤리엘의 문제다. <우리, 둘>은 철저히 니나와 마도의 러브스토리를 중심 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졸지에 생이별한 연인의 지독한 사랑에 감동한 관객이 눈물 흘리며 지켜보는 동안 계약조건에 따라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던 것뿐인 간병인 뮤리엘은 객체로 밀려나는 것을 넘어, 훼방꾼으로만 그려진다.

하지만 입장 바꿔놓고 조금만 따져 보면 뮤리엘의 대응은 아주 상식적이고 평범한, 그리고 그녀의 직업상 당연한 대처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철저히 니나의 절박함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기에, 니나가 뮤리엘에게 끼쳤을 상처와 손해는 그저 두 연인의 순애보에 어쩔 수 없이 추가되는 '부수적 피해' 수준으로만 취급될 뿐이다.

니나는 당장 마도를 안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든다. 뮤리엘의 직무 수행을 훼방 놓는 것은 물론 위험한 거래를 제안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 결과는 간병인의 해고, 그로 인한 실직의 공포로 이어진다. 니나와 마도가 자기 집을 소유한 비교적 안정된 중산층 은퇴자로 묘사되는데 반해 파트타임 노동자에 해당되는 간병인 뮤리엘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영화에선 그저 두 연인의 (설정된) 수난에 부수적으로 추가되는 위기요소일 뿐이다.

두 번째로는 수차례 이미 언급했지만, 보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눈살 찌푸려지는 니나의 폭주다. 니나가 마도를 만나기 위해 하는 온갖 시도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마도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주차된 차를 부순다거나 야간에 현관문을 몰래 열고 드나드는 식이다. 

4_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떼어놓을 순 없다

니나와 마도의 관계가 마도의 자녀들에게 밝혀지고, 강제로 서로 격리되는 사건 이후로 니나는 더욱 조급하고 불안정한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도는 둘을 떼어놓으려는 자신의 자녀들에 의해 강제로 호스피스 시설로 옮겨진다. 이제 이 불운한 연인들은 각자 고립되어 말라죽을 위기에 놓인다.

니나도, 마도도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못지않은 필사의 탈주를 펼치기에 이른다. 이 장면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연인들이 그들을 가로막는 방해를 뚫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감행하는 순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극적 카타르시스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5_정형화된 퀴어 로맨스를 넘어: 정교하게 연출된 문제작
 

<우리, 둘> 속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도착에 가까운 맹목적 순애보에 관한 호불호는 보는 이에 따라 나눠지겠으나, 둘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입장차는 없을 테다. 특별하고 별난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그동안 별로 다뤄지거나 조명되지 않았던 관계성, 주름살 가득한 백발의 여-여 커플을 소재로 맹렬하고 전투적이기까지 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것만으로 본 작품은 색다른 위치를 선점한다.

여기에서 관객과 나누고픈 또 한 가지는 영화 속 배경인 프랑스, 그리고 니나의 고향인 독일의 퀴어들이 처한 상황이 국내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 점에 대한 인식이다. 극중에서 주변 인물들 누구도 내심은 몰라도 겉으로는 두 연인이 퀴어라는 이유로 둘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혐오적 언동을 내뱉진 못할 정도의 개명된 배경이란 것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기존 퀴어물과는 차별화된) 파격적인 연출 설정과 그 결과물로 얻어지는 장르 영화적 쾌감의 수용 측면에서 해당 요소는 결정적 핵심은 아니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해당 영화가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신예감독의 정교한 연출은 탁월한 호흡을 펼치는 니나와 마도 역할의 배우에 의해 완성된다. 여성 거장 마가레테 폰 트로타의 <로자 룩셈부르크>(1986), <한나 아렌트>(2012) 등에서 역사 인물인 주인공들을 소화했던 독일의 전설적 여배우 바바라 수코바는 사랑에 눈먼 채 저돌적으로 질주하며 때로는 편집적 집착을 보이는 니나 역할로 그야말로 열연을 펼친다.

영화 쪽 경력은 바바라 수코바에 비해 수수하지만 마도 역을 맡은 마틴 슈발리에는 탁월한 경력의 연극배우로 '코메디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발탁될 만큼 검증된 연기자다. 니나가 연인을 향해 돌격한다면, 마도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행이 불편하다는 작중 묘사처럼 내면 연기와 미세한 동작으로 상태를 표현해야 하는데 두 고참 배우의 연기가 얼음과 불의 노래처럼 제대로 어우러진다.

영화 도입부와 중반부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히는 순간이 있다. 마치 상징기호처럼 등장하는 두 소녀의 등장 컷이다. 이 장면들은 두 주인공의 내면을 판타지처럼 묘사하며 심리상황을 함축적으로 관객에게 암시하는 것은 물론 이후 전개를 상상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치 두 노인의 몸 안에 그렇게 첫사랑이자 영속될 연인을 만난 소녀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작품정보>

우리, 둘 Two of Us, Deux
2019|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드라마/로맨스/멜로
2021.07.28. 개봉|95분|12세 관람가
감독 필리포 메네게티
주연 바바라 수코바(니나), 마틴 슈발리에(마도)
출연 레아 드루케(앤) 뮤리엘 베나제라프(뮤리엘) 제롬 바랑프랭(프레드릭)
허베 소그느(브레몬트)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버킷스튜디오
공동배급 버킷스튜디오

2020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퀴어영화 평론가상
2021 세자르영화제 데뷔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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