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도, 학교도.. 집 밖이 두려워요"

임송수,정우진 2021. 8. 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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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증오범죄 리포트] <상> 증오범죄에 떠는 아시아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지난 3월 20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 로건 스퀘어 모뉴먼트에서 ‘아시아인의 삶을 보호해 달라’ ‘아시아인 혐오를 중단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증오범죄 등으로 외출을 꺼릴 뿐 아니라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AP뉴시스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던 곳들이 이제 두려운 장소가 됐어요. 일상을 빼앗긴 기분이에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 김민규(28)씨는 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지난 6월 3일 한국에서 온 부모님과 시애틀 사우스센터몰을 방문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이같이 토로했다.

아시아계 증오범죄가 늘었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던 김씨는 부모님과 쇼핑몰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멀리서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찜찜함 속에 쇼핑을 하고 온 그는 다음 날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그 쇼핑몰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11발의 총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씨는 하루만 늦게 그곳을 방문했다면 부모님과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고 했다. 그는 “쇼핑몰에서도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라며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사건 이후 머릿속 한편에는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김씨의 생활 반경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절대 혼자 쇼핑하러 가지 않는다. 산책도 아파트 담장 안쪽에서만 한다”고 전했다.

미국에선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증가하면서 점차 일상 복귀가 이뤄지고 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다. 돌아갈 일상이 혐오로 얼룩진 탓이다. 이들에겐 공공장소도, 학교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팬데믹 기간에 직간접적으로 증오범죄를 체험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사는 정은정(26·여)씨는 지난해 12월 아파트 근처에서 길을 걷다 백인 중년여성으로부터 “중국으로 돌아가라. 너 같은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물리적 위협을 받았다. 정씨는 “사건 이후 외출할 때는 꼭 차를 타고 나가야만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는 유학생 유모(27·여)씨는 길거리에서 증오범죄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지난해부터 꾸준히 해온 조깅을 그만뒀다. 유씨는 “맨해튼은 원래 위험한 동네가 아니지만 최근엔 길거리가 무서워 잘 나가지 않는다”며 “외출이 필요하다고 하면 지인들이 동행하자고 제안하는 경우도 생겼다”고 전했다.


아시아계 증오범죄 반대 비영리단체 ‘STOP APPI HATE(SAH)’가 지난해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총 6603건의 아시아계 혐오 사건을 분석한 결과 공공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은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거리(29.4%) 공원(8.4%) 대중교통(8.7%) 등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이가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혐오 사건의 온상이 됐다. 교육기관인 학교(5.5%)와 대학(3.1%)도 혐오와 차별을 피해가지 못했다. 사적 공간에서 혐오 사건을 겪었다고 답한 이들은 8.8%에 불과했다. 사실상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거의 모든 공간에서 혐오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계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길 주저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 2월 4학년 학생 중 백인 학생은 52%가 학교로 돌아온 반면 아시아계 학생은 15%만 대면 수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올 3월 뉴욕시 내 아시아계 미국 어린이는 전체 학생의 18%를 차지하지만 대면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12% 미만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피터 키앙 매사추세츠대 아시아 미국학 교수는 “코로나19와 인종차별주의 확산이 대면 수업의 인종적 불균형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맨디 린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학교로 돌아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내 9살 아들은 집에서 노트북으로 강의를 듣는다”며 “밖에 있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저 끝없는 폭력과 괴롭힘이 있을 뿐”이라고 토로했다.

집단적 트라우마에 빠진 아시아계

정씨는 외출을 꺼리고 사람을 기피하기 시작한 데 대해 “아시아인인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로 눈치를 보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참담한 심경을 전했다. 이어 “백인 중년여성을 보면 화부터 난다”며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정씨 사례처럼 아시아계는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다. SAH 후속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 10명 중 7명은 정신건강 관련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인종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아시아계 미국인 5명 중 1명은 우울증, 자존감 하락 등 심리적·정서적 피해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셀 정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아시아 미국학 교수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그들 자신, 학교로 돌아가는 자녀들, 그리고 노인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며 “이들이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보스턴대와 하버드의대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증오범죄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을 보이는 사례들이 발생했다. 증오범죄 현장을 목격하거나 관련 영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 국립과학재단에서 증오범죄의 심리적 영향을 연구해 온 켈리나 크레이그 헨더슨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인종과 민족 때문에 표적이 된 사람들은 다른 범죄의 피해자보다 더 심각한 PTSD를 겪을 수 있다”며 “증오범죄는 지역사회에 퍼지고 그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송수 정우진 기자 songst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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