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내 목돈..디폴트 옵션이 藥 될까

명순영 2021. 8. 1.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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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수익률 초양극화

2.3% vs 9.5%. 2013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과 미국의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이다. 쉽게 표현해 한국은 노후자금을 불리는 데 미국보다 훨씬 못하다는 의미다. 호주 역시 8.9%로 한국보다 크게 앞선다. 2005년 도입된 국내 퇴직연금은 15년 만에 200조원 넘는 성장세를 이뤄냈다. 세계 최고 속도 고령화에 은퇴자금 시장은 급속도로 불어났지만, 이처럼 운용 성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은 이유는 운용 인력 역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한국은 퇴직연금 대부분을 원금 보장이 확실한 예·적금 위주로 굴린다. ‘저위험 저수익’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나재철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최근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디폴트 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의 별도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 금융회사가 시장 상황과 은퇴 시점에 맞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운용하는 제도다.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증권업계는 2019년부터 디폴트 옵션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은행·보험업계의 미지근한 태도와 함께 관련법 개정에 진전이 없었다.

현재 국내에서 운용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퇴직연금 자산은 212조원이다. 이 가운데 회사에서 알아서 정해진 수익을 보장해주는 확정급여형(DB형, 잠깐용어 참조)과 달리 확정기여형(DC형, 잠깐용어 참조) 가입자는 스스로 퇴직연금 운용 지시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방치되는 경우가 많아 DC형 적립금 중 83.3%인 58조원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다. 수익률도 높지 않아 최근 5년간 DC형 연평균 수익률은 1.64%에 그친다. 증권업계는 1%대에 머물고 있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려면 별도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 사전에 합의한 적격 상품에 투자하는 디폴트 옵션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금융투자업계 공격적 운용

▷“연금 부자 되려면 無전략 곤란”

실제 퇴직연금 운용 방식에 따라 수익률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미래에셋증권을 통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DC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 잠깐용어 참조) 가입자 14만명의 1년 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수익률 상위 5%의 평균 수익률은 38.6%였다. 하위 5%는 -0.7%로 원금 손실을 봤다. 운용 방식에 따라 1년 새 40%포인트에 달하는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연금 고수’는 상장지수펀드(ETF)를 비롯해 주식형 펀드 비중을 73%까지 늘렸다. 안전자산인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는 전체의 27%만 묻어뒀다. 수익률 하위 투자자는 제로금리(0) 수준의 예금에 연금을 방치했다.

장기 수익률도 점차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원리금 보장형과 실적배당형의 5년 수익률은 각각 1.64%, 3.77%로 나타났다. 연간 2%포인트 수준 격차에 복리 효과가 더해지면 은퇴 시점에 이르렀을 때 최종 수익률 격차는 몇 배 이상으로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증권업계가 은행·보험 퇴직연금보다 수익률이 높다는 점도 적극적인 운용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증권사에 맡긴 퇴직연금 수익률이 은행에 맡겼을 때보다 2.7배 높았다. 지난 2분기(4~6월) 증권사 퇴직연금 수익률은 7.4%였다. 반면, 은행은 2.7%에 그쳤다. 보험사도 2~3%로 은행과 비슷했다. 2018년 은행(1%)이 증권사(0.4%)보다 더 높았지만 2019년 증권사(3%)가 은행(2%)을 앞서기 시작해 차이를 벌렸다. 최근 증시

호황까지 더해져 직장인 노후자금인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 차이가 해마다 벌어지는 양상이다. 이른바 퇴직연금에서의 ‘K양극화’ 현상이 생긴 셈이다.

▶은행·보험업 수익률 낮지만

▷“노후자금은 안전이 최우선”

퇴직연금은 ‘노후자금 안정성’을 위해 주식에 직접 투자할 수 없게 돼 있다. 다만, 증권사를 통하면 주식처럼 거래 가능한 펀드(ETF) 등에는 투자할 수 있다. 은행과 보험사는 ETF는 불가능하고 주식·채권형 공모 펀드에만 투자가 가능하다. 은행과 보험은 공격적으로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수익률도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 자금을 원리금 보장이 안 되는 비교적 공격적인 금융 상품에 넣는 비율을 비교해보면 은행은 11%, 생명보험사 6%, 손해

보험사 1% 등이다. 반면, 증권사는 24%다. 선진국 퇴직연금 수익률 대비 우리나라 퇴직연금 수익률이 떨어지는 이유도 이 같은 투자 방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 퇴직연금 원리금 보장 상품 비율은 89%였지만, 미국·호주 등 선진국은 30~60%로 낮았다.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이 수익률을 높여줄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해외 사례를 보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20개국 가운데 16개국이 퇴직연금에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현재 디폴트 옵션 제도가 없는 국가는 한국, 에스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공화국 등 4개국이다.

이 가운데 실적배당형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과 호주다. 미국은 1981년 퇴직연금 제도를 개편하며 실적배당형 디폴트 옵션을 처음 도입했다. 실적배당형은 운용 실적에 따라 퇴직연금 만기 수익률이 달라지는 상품을 의미한다. 호주도 1992년 퇴직연금 개정안에 실적배당형 디폴트 옵션 제도를 편입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두 국가는 2013~2019년 연평균 9.5%, 8.9%의 높은 수익을 냈다.

그러나 은행·보험업을 중심으로 노후자금을 공격적으로 운용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강하다. 은행·보험업계가 증권업계 주장에 반기를 드는 데는 증시 호황을 타고 공격적으로 시장을 장악하려는 증권사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배어 있다. 원금 보장형 상품 수익률에 실망한 가입자가 증권사로 자금을 옮기는 ‘머니 무브’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가운데 증권사 등 금융투자업계가 차지한 비중이 처음으로 20%를 넘어섰다. 미래에셋·NH투자·한국투자·삼성 등 4개 대형 증권사에 따르면 은행·보험에서 금융 투자로 이동한 IRP자금 규모는 1분기에만 3122억원에 달한다. 2019년(1563억원)과 비교하면 1년 새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잠깐용어 *DC·DB·IRP DC형(Defined Contribution·확정기여형)은 회사가 매년 정해진 금액을 넣고, 근로자가 운용하는 방식이다. DB형(Defined Benefit·확정급여형)은 회사가 운용해 근로자에게 정해진 금액을 지급한다. 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개인형 퇴직연금)는 개별적으로 돈을 넣어 운용하는 방식이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0호 (2021.08.04~2021.08.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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