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공무원 면피용 비밀 준수 의무?

최현철 2021. 7. 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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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백신 예약 대란
근본 원인은 수급 불안
하반기 접종계획도 위태
최현철 정책디렉터

‘설마’ 했었다. IT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백신 예약 시스템이 마비되는 상황은 아주 이례적인 오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지난 20일 내 차례가 왔다. 1시간 전부터 컴퓨터를 켜고 기다리다 저녁 8시가 되자마자 ‘광클’에 돌입했고, 대기선의 1만6000번쯤에 안착했다.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한마디 했다. “나, 20년 넘게 명절 기차표 예매해온 프로 예약러야.”

하지만 나름 얼리 어답터라고 우기던 50대 가장의 권위는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더디지만 꾸준히 줄던 대기 순번이 0이 되는 순간 나는 ‘퉁겨져’ 나가고 말았다. “이게 뭐지?”라는 외침에 딸은 쿨하게 “그게 접속오류야”라고 일깨워줬다. 다시 접속해보니 20만번이 넘었다. 휴대전화 단톡방마다 비슷한 또래의 절규와 비난, 욕설이 난무했다. 결국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을 마칠 수 있었다.

접속 오류는 지난달 1일 얀센 백신 예약 때부터 시작됐다. 이달 9일 교사와 돌봄 인력 예약에서도 나타났고, 12일 첫 50대 예약에서도 반복됐다. 53~55세 예약 때는 아예 먹통이 됐다. 방역당국은 서버까지 증설했지만 그게 고작 30만명 정도가 동시 접속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난 19일 동시 접속자가 1000만명이었으니 사고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대로라면 40대 이하 예약에서도 똑같은 난리가 날 게 뻔하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복지부 추경 예산 1조8500억원에는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전산구축 명목으로 42억원이나 책정됐지만 질병청 서버 증액 예산은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한 번 더 울화통이 터졌다.

서소문포럼

겉보기엔 전산 기술적인 문제 같지만 사실 백신 수급의 불안정성이 근본적인 이유다. 지난 4월과 5월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재고가 부족해지며 접종 예약이 중단된 것이 신호탄이었다.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복장이 터지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방역 당국은 지난 12일부터 6일간 받기로 한 55~59세 사전 예약을 14시간 만에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당시 모더나 재고는 80만 회분, 이달 중순 200만 회분가량이 추가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물량이 다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340만명에 이르는 55~59세 예약을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예정 물량을 다 채우자 놀란 나머지 문부터 닫고 본 것이다. 접속오류 속에서도 10시간 넘게 기다렸던 대기자들의 분노 게이지는 만랩을 찍었다.

23일에는 모더나가 일방적으로 이번달 남은 물량 선적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매일 브리핑을 하는 방역당국은 사흘이 지나서야 이를 공개했다. 얼마나 못 들어오는지, 왜 못 들어오는지 등에 대해서도 “비밀유지협약 때문에 밝히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25일 75만 회분, 31일 121만~196만 회분이 오기로 했는데 연기됐다”고 공개해버렸다. 도대체 앞으로 방역당국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의아해졌다. 28일 진행된 방역당국의 브리핑에선 당연히 이에 대한 항의성 질의가 쏟아졌다. 이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도 드러났다. 브리핑 내용을 잠깐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자 “여당 대표가 일정별 도입 물량 공개한 것이 비밀유지협약 위반이 맞나?”

▶손영래 중수본 사회전략반장 “이게 협약 대상인지 실무 논의를 진행 중이다.”

▶기자 “공급 차질에 대해 모더나에 법적대응할 계획 없나.”

▶손 반장 “공급일정은 분기·반기·연도별로만 있어 법적 대응이 가능한지 검토해봐야 한다.”

결국 분기 안에 약속한 물량만 공급하면 구체적으로 언제 줄지는 모더나 마음이고, 그나마 그 시점을 어겨도 모더나는 책임이 없다는 얘기다. 반면 모더나는 안 지켜도 그만인 일정과 물량 통지를 우리가 공개하면 비밀준수의무 위반이다. 한마디로 우리만 비밀과 약속을 지켜야 하는 불평등 계약인 셈이다. 또 그 말을 믿고 월별 접종계획을 짜면 언제든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오늘(30일) 공개할 예정인 8월 접종계획도 근본적으로 이런 한계를 품고 시작하게 된다.

아무리 국제적으로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라고 해도 주권 국가와 민간 회사가 이런 계약을 맺을 수 있을까? 송영길 대표는 “모더나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예정대로 백신은 들어온다”고 말했다. 혹시 비밀준수 의무라는게 공무원들의 면피용 계약은 아닐까? 날은 더운데 자꾸 부아만 돋는다.

최현철 정책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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