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8)중국에서 훔친 '씨앗'..다르질링 홍차의 기원

2021. 7. 2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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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인가 영웅인가 '로버트 포춘'

1848년 6월, 영국 첼시왕립식물원 원장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은 동인도회사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중국. 그의 두 번째 중국행이었다. 처음 중국에 간 것은 아편전쟁 직후인 5년 전이었다. 왕립원예학회 소속이었던 그는 중국에 3년간 머물며 영춘화, 금낭화, 치자, 장미, 금귤 등의 식물을 수집했다(값비싼 보석도 챙겼다). 식물 표본을 잔뜩 싣고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명예와 첼시식물원장 자리를 잡았다. 두 번째 중국행의 목적은 중국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돈이 되는 나무, 차나무를 훔쳐오는 것이었다.

다르질링은 옛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피서하던 곳으로 해발이 높다, 다르질링에서 수확한 잎을 선별하는 여성들.
1662년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와 결혼했다. 캐서린 공주는 대단한 차 애호가였다. 티파티를 열어 왕실 성원과 귀족들을 초대했다. 누구나 그 파티에 가고 싶어 했다. 차가 상류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중국산 비단옷을 입고, 중국산 자기에 중국산 홍차를 따라 마시며 부를 과시했다. 중국 사람들이 아무것도 넣지 않은 맑은 차를 즐기는 데 비해 영국 사람들은 설탕과 우유도 넣었다. 당시 설탕은 멀리 카리브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영국인은 사치품에 사치품을 더하는 것이 부자의 수준에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방직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산업혁명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작용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오염된 물이다.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돼 영국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물 대신 맥주를 마셨다. 직공들은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방직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맥주를 마셨다.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근무 중 음주는 사고를 일으키기 마련. 음주 사고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때 차가 등장했다. 직공들은 맥주 대신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맥주를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지만, 차는 그렇지 않았다. 차의 카페인 때문에 정신이 또렷해지고 집중이 잘됐다. 사고도 대폭 줄었다.

차는 곧 영국 전 국민의 필수품이 돼버렸다. 가장 평범한 영국 사람도 차를 사는 데 한 달 월급의 10%를 썼다. 문제는 영국인이 마시는 차를 전부 중국에서 사온다는 것. 영국은 중국이 생산하는 차의 20%를 수입해갔다.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한 동인도회사가 취급하는 품목의 90%가 차였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무역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결국 중국에 아편을 팔았다. 그로 인해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 진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떼어 주는 것을 포함한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렇게 중국은 힘없이 무너졌다.

로버트 포춘.
한편, 영국인이 그렇게 차에 열광했어도 차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차를 가공하는 방법은 100% 중국이 독점했다. 아편전쟁이 끝나고 굳게 닫혀 있던 중국의 빗장이 조금 열리자 영국 동인도회사는 차 만드는 기술을 훔쳐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3년 동안 식물을 채집하고 중국에 관한 책도 쓴 포춘을 고액 연봉으로 모셔가 차 씨앗과 차나무 묘목을 훔쳐오게 한 것이다.

포춘은 1848년 6월 런던을 출발해 9월에 홍콩에서 배를 갈아타고 상하이로 갔다. 중국 속으로 깊이 들어간 그는 위험한 고비도 겪었지만 결국 수많은 차나무 묘목과 씨앗을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인도까지 몇 달이나 걸려 가는 동안 씨앗과 묘목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배에는 선원들이 마실 물을 실을 공간도 부족했다. 몇 달 동안 차나무 묘목에 줄 물은 더욱 없었다. 수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묘목은 안 좋은 상태로 인도에 도착했고 심어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포춘은 위즈 상자를 만들었다. 영국인 식물학자 위즈 박사가 생각해낸 이것은 말하자면 밀봉한 상자였다. 상자에 흙을 담고 식물을 심은 다음 밀봉하면 다시는 물을 주지 않아도 식물이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밀봉이다. 밀봉을 하면 상자 안이 작은 생태계가 돼 식물이 살아갈 수 있다. (한 남성이 유리병에 식물을 심어놓고 밀봉한 채 뒀는데 40년이 지나도록 식물이 잘 살고 있다는 뉴스가 얼마 전에 나왔다.)

첼시왕립식물원장이던 로버트 포춘, 중국에서 차 묘목 훔쳐

포춘의 차나무는 인도 다르질링만, 인도 아삼 재래종은 인도 전역 퍼져

사실 위즈 상자로도 단번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위즈 상자를 믿지 못한 한 선원이 이대로 두면 차나무 묘목이 모두 죽겠다고 생각해 상자 뚜껑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물도 줬다. 차나무는 모두 말라 죽었고 씨앗은 곰팡이가 펴 쓸 수가 없었다.

포춘은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상자에 흙을 채우고 차나무 씨앗을 얕게 심고 흙으로 살짝 덮었다. 물을 주고 나무판자로 단단히 봉한 다음 배에 태웠다. 4달 후 씨앗은 건강한 상태로 인도에 도착했고 무사히 싹을 틔웠다. 포춘은 8명의 제다 기술자와 차 만들 때 필요한 도구까지 전부 갖춰 상하이를 출발했다. 4일 후 홍콩에 닿았고 증기선으로 갈아탄 후 인도에 도착했다.

포춘은 1만7000개의 차 씨앗, 2만3892개의 묘목, 차 가공 전문가를 인도에 데려갔다. 중국 최대 수출 상품의 핵심 비밀을 통째로 가져간 것이다. 당시 영국 사람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포춘이 중국에서 훔쳐온 차나무 품종이고, 하나는 아삼에서 발견된 차나무 품종이었다. 둘 다 차나무인 것은 확실했지만 매우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포춘의 차나무는 잎이 작고 향기가 좋았고, 아삼의 차나무는 잎이 크고 맛과 향이 진했다. 처음에 영국 사람들은 아삼 차나무보다 포춘의 차나무를 많이 심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아삼 차나무가 훨씬 잘 자랐다. 포춘의 차나무는 아삼 차나무의 생산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포춘의 차나무는 인도 북부 해발 고도가 높은 다르질링에 심어졌고, 다른 대부분 지역에서는 아삼 차나무가 심어졌다. 포춘이 가져간 차나무는 그렇게 다르질링 홍차의 기원이 된다.

이후 인도의 제다업은 신속히 발전했다. 아삼, 다르질링, 닐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 생산지가 됐다. 반면 중국의 차 수출은 날로 줄어들었다. 1888년 인도 차 수출량이 중국차 수출량을 뛰어넘었다. 중국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몇천 년 동안 독점해왔던 기술이 유출돼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그들은 차 생산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다시 차 생산 세계 1위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효율은 그리 좋지 않다. 2016년 기준 중국의 7만개 차 생산 회사의 수출 총액이 14억8000만달러였는데, 영국 홍차 제조사 립톤의 매출이 30억달러였다.

영국인은 포춘을 영리하고 용감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또한 “포춘 덕분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차를 마실 수 있게 됐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중국인 입장에서 포춘은 그저 ‘식물 채취꾼, 도둑, 산업 스파이’였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9호 (2021.07.28~2021.08.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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