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보여준 영리한 화가

2021. 7. 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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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에디 마르티네즈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 가운데 모방에서 출발하지 않은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요즘 미술 시장 대세로 떠오른 이 미국 화가의 역동적인 회화는 그가 이런 창조의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영리한 화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미국 브루클린에서 작업하는 에디 마르티네즈(Eddie Martinez, 1977년생)가 그 주인공이다.

“내가 내 작품과 작업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속도감과 여과되지 않은 날것의 흔적 만들기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그의 회화는 ‘날것’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는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재현적 이미지와 추상적 원칙들 간 대화를 시도한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를 다양한 색채와 함께 마음껏 펼쳐 보여준다. 한마디로 생생한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통해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분출한다고나 할까.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신선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전통에서 출발한 혁신이라는 요소와 더불어 마르티네즈가 컬렉터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는 중요 이유 중 하나다.

‘높게 나는 새(High Flying Bird, 2014년)’. 2019년 11월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 출품돼 낮은 추정가의 10배가 넘는 금액(1572만5000홍콩달러, 약 23억원)에 낙찰, 그의 전작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작품이다.
‘높게 나는 새’는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여러 거장의 요소를 매력적으로 혼합하고, 이를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승화해낸 그의 대표작이다. 화가 자신이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본인의 회화 주요 영감으로 꼽았듯이, 이 작품은 드 쿠닝의 구상과 추상이 뒤섞인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키는 열정적인 리듬감과 생동감이 먼저 눈에 띈다. 이 밖에도 코브라 그룹(CoBrA·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약자. 전후 시기 원색적인 색채를 중심으로 활기 넘치는 표현주의적 회화를 표방한 북유럽 화가들의 모임)의 생기 넘치는 붓질이나 환영, 환각에 가까운 자유로운 형태와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영향도 엿보인다. 하지만 검정 테두리 선에 둘러싸인 다양한 유기적 형태와 색채가 뒤엉키면서 진동을 일으키는 듯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은 그만의 특색이다. 이처럼 마르티네즈는 미술사 규범과 전통을 동시대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온전한 자기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낙서화는 그에게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자 그 자신 자체기도 하다. 보스턴에 있는 미술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마르티네즈의 진정한 창조성은 길거리에서 다져진 것이라 말하는 편이 옳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거리에 낙서화를 그리면서 성장했다. 본인 그림 위에 낙서를 한 듯한 자유로운 붓질과 촉감을 보라. 전통 회화 재료인 유화 물감 이외에 낙서화에 주로 쓰이는 스프레이나 에나멜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 나아가 그는 이 작품에서 문방용품인 압정을 사용한 것처럼 때로는 청테이프, 포장지, 고무줄, 테니스 공, 심지어 씹던 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총동원해 흥미로운 질감을 창조해낸다. 이를 통해 도시 대중문화의 생동감과 길거리 싸구려 감성을 자신의 회화에 당당하고 멋들어지게 담아내고, 시각적인 도시 언어를 만들어낸다. “쓰레기통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조각처럼 보이듯이 나는 길거리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그의 언급처럼.

‘무임승차(Easy Ride, 2019년)’. 재현과 추상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는 자유로움, 대담한 선과 생생한 색채 등 거칠고 표현적인 길거리 미술의 특성을 캔버스에 잘 녹여낸 작품이다.
또 다른 예로 ‘무임승차(Easy Ride, 2019년)’를 보자. 얼핏 봤을 때 해골을 닮은 커다란 머리 모양이 바스키아의 자유분방한 낙서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겉보기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듯 자유분방한 몸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사실은 대단히 복잡한 제작 과정과 고도로 훈련된 정교한 소묘 실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안다면, 이 작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러움’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은 작은 메모지에 매직펜으로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이 기본 구성을 확대해 캔버스에 옮긴 후, 즉흥적인 붓질과 세심한 터치를 혼합하고, 다양한 일상 재료를 덧붙이기도 한다. ‘무임승차’가 보여주듯 많은 측면에서 그를 규정짓는 회화적 요소들, 즉 재현과 추상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는 자유로움, 대담한 선과 생생한 색채 모두 거칠고 표현적인 길거리 미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미술사 전통과 길거리 낙서화를 정교하게 혼합한 그의 회화에는 역동적인 도시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동시에 현실 속 형태를 쥐락펴락 마음대로 변형하는 자유분방함, 풍부하면서 대담하고 직관적인 물감의 사용, 구성적 속도감과 생동감 등 자신만의 독창적인 요소들을 잃지 않는다. 그 결과, 고정된 캔버스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원지에서 청룡열차를 탔을 때처럼 흥미진진한 박진감과 긴장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들이 너를 단련시킨다(They Build You Up to Knock You Down, 2009년)’. 이 작품은 2021년 5월 24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 출품돼 낮은 추정가의 3배에 달하는 금액(600만홍콩달러, 약 9억원)에 낙찰됐다.
형태들의 절충적인 혼합과 켜켜이 쌓은 다양한 색채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마르티네즈 특성은 초기작에서도 발견된다.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들이 너를 단련시킨다’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작품이 그 좋은 예다. 힙합 라임처럼 리듬이 있는 제목은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우면서도 세심하고 세련된 마르티네즈 회화적 특질을 그대로 반영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환상 내지 생각(말풍선 속 복잡한 이미지들)과 현실(누워 있는 사람)의 혼합, 유화 물감 같은 전통적인 미술 재료와 매직펜, 스프레이 물감, 실리콘 등 새로운 매체들의 혼합을 통해 그의 작품은 정체된 캔버스 표면에 출렁이는 듯한 입체감을 부여하고, 나아가 평범한 일상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매력을 발산한다.

미술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개인 경험, 대중문화와 스포츠 같은 동시대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마르티네즈 회화는 친근하면서도 전혀 낯선 인물과 공간, 오브제들을 선물처럼 보여준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흥미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9호 (2021.07.28~2021.08.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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