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것들" 413일만에 "잘 들리십니까"..문 연 김정은, 왜

정용수 2021. 7. 2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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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체결일 맞춰 복원
北 '최고존엄'의 전략적 결정
당장은 식량난,코로나 해결
속내엔 대북제재 해제 청구서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기계실. 남과 북의 담당자들이 직통전화의 호출 버튼을 눌러 수화기를 들었다. “잘 들리십니까?”“잘 들립니다”는 통화 상태 확인 대화가 오갔다. 이어 남북한의 연락대표부 역할을 하는 연락사무소 통신선은 기계점검을 거쳐 오전 11시 4분부터 3분 동안 통화가 이뤄졌다. 남측 연락대표가 “1년여 만에 통화가 재개돼 기쁩니다”라며 통신선 복원된 만큼 온 겨레에 기쁜 소식 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알렸다.

지난해 6월 9일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남북한의 모든 통신선을 차단한다는 북한의 일방적 발표 이후 통신선이 차단된 지 413일 만이다.

이날 통화에서 양측은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5시에 정기적으로 통화하는 방식으로 통신선을 유지하기로 했다. 남측의 정기 통화 제안에 북측이 동의했다고 통일부는 밝혔다.

이종주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는 남북 합의에 따라 오늘부터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복원된 것을 환영한다”며 “남북 간 소통이 다시는 중단되지 않고, 복원된 통신연락선을 통해 남북 간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고 합의사항들을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북한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ㆍ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그 책임을 한국 정부로 돌리며 급기야 독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와대를 향해 “저능아”라거나 “봄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며 줄기차게 비난했다. 지난해 6월 9일엔 “남조선 것들과의 일체 접촉공간을 완전격페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 버리기로 결심한 첫 단계의 행동”이라며 통신선을 끊어 버렸다. 일주일 뒤인 6월 16일엔 개성공단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그런 북한이 “수뇌분들의 합의에 따라 북남 쌍방은 7월 27일 10시부터 모든 북남통신연락선들을 재가동하는 조치를 취하였다”(조선중앙통신)고 공식 발표했다. 즉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통신선 복구를 결정했다는 발표다. 이날은 정전협정 체결 68주년이기도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남북 통신선 복구는 남북 관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남북관계 복원의 신호탄”이라며 “과거 북한이 남북관계의 문을 닫을때 연락채널을 가장 먼저 폐쇄한 점을 감안하면 반대로 연락채널의 복구는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의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당국 간 대화 재개와 세 차례의 정상회담과 교류를 했던 ‘어게인 2018년’도 기대해볼 만 하다는 얘기다. 조선중앙통신도 “통신연락선들의 복원은 북남관계의 개선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2018년 4월 27일 오전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위원장이 180도 방향을 바꿔 대화 재개에 나선 건 북한 내부 상황과 내년 한국 대선,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까지 감안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이다.

1차적으론 북한의 악화된 식량과 코로나19 상황이다. 북한은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국경선 총살’이라는 극한 수단까지 동원하며 국경을 차단했지만 이는 식량난으로 이어졌다. 김 위원장 스스로 지난달 ‘알곡 부족’을 고백했을 정도다.

북한 역시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퍼지며 북한식 경제살리기인 이른바 ‘단번도약’은 엎친 데덮친 격이다. 김 위원장의 공개 현지 지도 자체가 줄었다. 이달 들어 그의 공개 활동은 세 차례에 불과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 68주년인 27일 자정에 6·25 전쟁 전사자 묘역인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를 참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27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일 김일성 주석의 27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한 데 이어 이달 들어 두 번째 참배 행보를 보였다. [연합뉴스]

이같은 악재를 대외 여건 개선을 통해 완화하기 위해 대남 정책을 전략적으로 선회했다는 관측이다. 즉 김 위원장의 대남 보따리엔 대대적인 식량·비료 지원과 백신·의약품 지원이 상수로 들어 있으리라는 관측이 많다.

한국의 정치 상황도 변수였다. 북한으로선 문재인 정부를 내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상대하는 게 최대의 레버리지를 동원할 수 있다고 봤을 가능성이 있다. 임기 내내 전력을 투입했던 남북 관계 개선이 임기 말에 무위로 돌아가는 상황은 청와대로서도, 여당으로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때문에 지금을 청와대를 상대할 적기로 봤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단 남북은 2007년 대선을 두 달 앞두고 개최한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다양한 교류ㆍ협력과 관련한 합의를 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이행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때문에 이번에 남북 만남이 재개되면 현 정부 임기중 가시적 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취임 후 반년이 흐르며 확인된 바이든의 행정부의 속내도 김 위원장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그간 북한은 미국을 직접 상대하는 것을 선호해왔고, 그게 안될 경우 한국을 카드로 활용하곤 했다. 이에 대한 역대 한국 정부의 입장은 보수건 진보건 ‘한국 없이 북·미 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였다. 이제 윤곽이 나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제재 유지다. 북한이 움직이지 않는데 미국이 먼저 제재 카드 완화에 나설 가능성은 적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남북 대화 재개 신호를 낸 건 식량난·백신난 해소 목적을 넘어서 남북 대화를 통해 한국 정부엔 미국 정부에 '대북 제재 해제'를 설득하도록 하고, 바이든 정부엔 '남북 함께'를 보여주며 미국은 압박 수위를 낮추라고 할 예고편이 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앞으로 꺼낼 협상 보따리엔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보여달라고 요구할 청구서가 포함돼 있고, 여기엔 식량·백신 같은 단기적인 경제적·인도적 지원 정도가 아니라 이를 넘어선 제재 완화 카드까지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임기내 이행’이라는 시한까지 부대 조건으로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건 남북 간 상황 전환을 100% 활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북한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전면 중단 상태인 북핵 협상 재개를 위해선 남북이 먼저 물꼬를 터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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