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도, 남편도 등을 돌렸다.. 피해자 여성이 겪어야했던 일

김상목 2021. 7. 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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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갈매기> 투쟁으로 이름을 되찾은 여성의 이야기

[김상목 기자]

 영화 <갈매기>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영화 <갈매기>는 미투 운동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동안 '미투'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달리 만든 이의 결기가 더 진하게 다가온 작업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그는 대학 문턱을 밟지 못한 60살의 조그만 생선가게 주인이며 폐경도 지났고 낡은 다세대 연립주택에서 산다. 위치도 별로 좋지 않은 작은 가게에서 오복은 평생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뒤덮은 재개발 광풍 속에서 그를 포함한 인근 상인들은 보상을 요구하며 구청에 맞서는 중이다.

생선가게 주인 오복은 큰 딸의 혼사를 맞는다. 동사무소 공무원이 대수냐며 구수하게 쏘아대지만 사돈집에 잔뜩 주눅 들고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큰 탈 없이 상견례를 치른 후 그는 기분 좋은 마음에 동료인 시장 상인들과 과음을 한다. 다음 장면에서 이어진 약 10초간의 암전. 그리고 피가 흐른다. 오복의 끔찍한 시간이 도래한다.

소수의 희생을 제물로 유지되는 공동체의 한계
  
 영화 <갈매기>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오복은 자신이 겪는 상황이 혼란스럽다. 믿고 의지하던 동료 상인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집단주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가해자의 공헌과 역할을 누누이 강조한다. 눈치를 살피던 가해자는 분위기를 등에 업고 오히려 기세가 등등하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적반하장의 태도는 우리 일상 주변 곳곳에서 목격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아도 일단 큰 소리부터 치고 보는 흔해빠진 수법이다. 하지만 오복은 놀라고 당황스러울 뿐이다. 나는 피해자인데 왜 내가 죄진 것 같지?

오복의 남편은 무던한 호인이지만 결코 아내의 편이 되지 않는다. 그 또한 시장 상인들,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행태와 동일한 태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의 행태가 아니다. 남편은 물론 언니, 동생, 누님 하던 시장 상인들 또한 가해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앞장서서 해결하는 기여를 고려해야 한다며 오복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복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굴복하느냐, 악다구니를 쓰느냐. 오복은 후자를 택하고, 그 결과 모두에게서 외톨이가 된다.

남편도, 이웃도, 그 누구도 내편이 아닌 상황에서 오복에게 남은 건 두 딸 뿐이다. 딸들도 역시 당혹스럽고 갈팡질팡 하지만 피해자와의 연대에 가장 근접한 존재들이다. 영화에서는 오로지 딸들만이 어머니의 문제 해결에 제한적으로나마 협력한다.

하지만 동시에 딸들은 오복이 투쟁을 망설이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생선장수집 딸이 공무원 집안과 사돈을 맺는다는 건, 두 집안의 사회적 지위 격차 문제를 동반한다. 오복의 조력자에 가까워 보였던 큰딸은 바로 그 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다. 망설이는 어머니에게 가해자 고발과 법적 대응을 설득하던 큰딸은 예비신랑의 가족이 자기 집안을 얕보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데 지친 나머지 오복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터뜨리기도 한다.

어렵게 쟁취한 밝은 미래에 어머니의 투쟁이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큰딸은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면서 그러한 속물 근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기에, 그런 큰딸의 태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큰딸과 막내딸, 두 딸 만이 어머니의 투쟁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 준다. 이 가족에서 남편과 딸들의 극단적 대비는 한국사회에서 가족이란 집단이 갖는 긍정과 억압의 양면성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영화 후반부에서 가족 중 남편의 존재감은 대외적, 공식적으로 가족이 총출동해야 하는 큰딸 결혼식 외에는 거의 소멸해버린다.

오복을 배신하는 시장 상인들은 우리가 늘 겪는 조직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진 게 없기에 작은 이해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상인들 중 누구도 오복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오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이 오복의 처지가 아닌 것뿐이다. 그들은 그저 오복이 참아주면 모든 게 안심이고 예전처럼 공동체의 평화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안일함에 빠져있을 뿐이다. 하지만 60 평생 '나' 자신을 위해 뭔가 해본 게 없던 오복은 강제로 겪게 된 사건으로 각성해버린다. 그녀는 이제 과거의 오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노동운동이나 생존권 투쟁에 당사자로 나서게 된 평범한 장삼이사들을 이미지로 표현할 때 흔히 머리띠를 질끈 묶는 모습을 묘사하곤 한다. 오복은 가족의 명운이 걸린 재개발 싸움에 참여하던 순간에도 근본적인 각성에 이르지 못했었다. 그런 권리투쟁은 이기적 욕구와 정당한 인권의 경계에 서 있으며 유형은 같아도 장소와 상황, 사람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오복이 속했던 저항 공동체의 요구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그 기저의 동력은 자본주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기에 (사건 이후 공동체에 배척당한 채) 붉은 조끼와 머리띠를 한 오복의 표정은 길을 잃은 존재의 전형 그대로다. '우리'를 그렇게 강조하던 시장통 공동체가 보상금에 대한 일념과 그를 쟁취하기 위한 욕망에만 충실할 때 목표를 위해 수단은 정당화된다. 작은 치부(라고 규정되는 것) 따위는 덮고 넘어가면 될 사소한 사안일 뿐이다. 많은 투쟁 공동체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의 투쟁을 촉발한 기존 기득권의 폐해를 답습하는 이유다.

날지 못해도 꼿꼿이 일어서려는 시도
  
 영화 <갈매기>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오복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으로, 스스로 고립되는 싸움을 이어나간다. 조언을 듣고 수소문하며 영화 후반의 그녀는 악다구니 대신 '상식적인' 과정과 절차를 밟는다. 고소장을 쓰고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찾는다. 하지만 투쟁하는 이들의 거칠고 사나움을 점잖게 꾸짖는 자들이 정작 합리적인 주장은 외면하는 행태처럼, 오복의 노력은 역시나 결실을 맺지 못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각자의 이익 앞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통한 방법을 누구나 익힌 것처럼 <갈매기>는 일말의 억지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 구성인 셈이다.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 뒤, 마치 헤매듯 길을 걷던 오복은 자신처럼 외로이 투쟁하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목격한다. 동네 슈퍼에서 음료를 사 마시며 사연을 묻는 오복에게 가게 주인은 심드렁하게 "저런다고 자기만 손해죠"라고 말한다. 아마 오복도 (그리고 우리 대부분 또한) 자신이 피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런 태도였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늘 멀리 떨어져 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기에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거나 두려운 나머지 절규하고 호소하는 이들을 매도하곤 한다.

무관심에 맞서는 약자의 마지막 방법은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뿐이다. 오복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결의를 다지며, 서부극 클라이맥스에서 악당과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주인공처럼 가해자 앞에 선다. 그 결연한 시선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이제 그를 두려워하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증거가 없다고? 내 자신이 증거라고 말하듯, 우뚝 선 오복의 마지막 장면은 최초의 사건 후 시장 입구로 향하던 교차로의 풍경, 그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던 부감 샷과 곧바로 연결된다. 그는 결기 어린 눈빛과 표정으로 여성으로서 6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구 집 딸, 누구의 아내, 누구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 "주오복"을 직접 쓴다. 여기에 <갈매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연출과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배우들의 합이 영화적 현실을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정교하게 배치한 이야기를 통해 <갈매기>는 퍽 많은 말을 관객에게 전한다. '피해자다움'을 인위적으로 설정하거나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물론 감독이 전하려는 대의명분을 억지로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교조적 태도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러면서도 <갈매기>는 (전형성과는 거리를 두되), 거품과 오독을 빼고 본질을 담은 순수 결정체를 누수 없이 전달한다.

더 많은, 그리고 더욱 다채로운 여성서사를...
  
 영화 <갈매기>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최근 한국 독립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흐름은 여성주의 경향과 연결되어 있다. 소재 발굴 면에서도 그동안 간과되거나 대변되지 못한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여성 서사는 앞으로 더 보여줄 것이 넘쳐나는 분야다. 물론 시행착오 또한 숱하게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즉, '이런 여성주의 경향은 바람직하고 저런 경향은 이제 식상하고' 식의 언급보다는 양질 전환의 법칙을 뒷받침할 다양한 분류와 평가가 더 많이 등장하면 족할 상황이다.

<갈매기>는 상대적으로 여성주의 영화에서도 그동안 조명되지 않은 주체를 다루는 희소성 있는 시도인 동시에, 자칫 대립되는 사안으로 오독되기 쉬운 다른 사회운동 층위와의 관계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설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복잡한 교차로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잡이를 제공하려는, 조금 일찍 스스로 길을 개척해본 이들의 태도가 묻어나는 영화다. 만약 극장에서 <갈매기>를 보지 못한다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는 작품으로 남게 될 테다.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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