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왜 써요?' 아이들이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주세요
[이무완 기자]
▲ 고등학교 교사인 구자행이 보여주는 글쓰기 수업 <국어 시간에 시 써 봤니?>와 <국어 시간에 소설 써 봤니?> |
ⓒ 양철북 |
목 없는 아이들, 목소리를 듣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씻고 누웠다.
잠시 눈 한 번 감았다가 떴는데 아침이다.
기절했다 깬 것 같다. _김민조(경남여고·1학년)
우리 교실 뒷자리에서
수업하다 아이들을 보면
등만 있고 목이 없다.
목 없는 아이들이 불쌍하다. _윤세원(부산고·2학년)
이 나라 고등학교 교실 모습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가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자못 궁금하다. 과묵하기로 치면 온 우주에서 으뜸인 고등학교 아이들 속엣말을 어떻게 받아냈을까. 그 이야기를 <국어 시간에 시 써 봤니?>나 <국어 시간에 소설 써 봤니?>에서 구자행 선생님이 가만가만 들려준다. 제목만 봐서는 학생을 독자로 삼은 듯하지만, "국어시간에 아이들과 시 쓰기를 하고 싶은데, 첫 발을 어떻게 떼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교사가 독자 대상이다.
입시 경쟁에 내몰려서 쫓기듯이 살아서도 안 되고, '내일을 위해서!'란 구호 아래 오늘의 소중한 시간을 수단으로 삼아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제 삶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온갖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도 알고, 자기를 당당하게 드러내 보기도 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눈을 돌려 보기도 하고, 세상일에 목소리를 내 보기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6~7쪽)
'교육은 이것이다' 하고 세상 그 누구도 똑 부러지게 말하긴 어렵다. 자신이 '교육' 받은 경험이나 자녀를 교육한 경험, 언론으로 보고 들은 사례로 교육을 뜻매김하고 그게 모든 교육을 말하는 것처럼 떠벌린다.
나는 수업 활동이 무슨 매뉴얼처럼 정형화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매뉴얼처럼 되면, 따라 하기는 쉽고 편해도 새로운 수업이 창조되기는 어렵다.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교사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라야 하고, 학생마다 다가가는 방식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교실에 그렇게 살아야 다양성을 존중하며 사는 세상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10쪽)
누구라도 곧잘 '어떻게'에 치중하다 보면 자꾸만 매뉴얼을 찾고 방법론에 끌리게 마련인데, 구자행은 교실마다 스스로 길을 내면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 말을 들어주는 일, 이보다 위대한 수업은 없다
책을 펼쳐보면 '무엇으로' '어떻게' 시 쓰기를 할 것인지 답해놓았다. 답해준다고 했지만 고등학교 교실 시 쓰기 수업이다. 대학 입시만 보고 내달리는 아이들에게 '도대체 시 쓰기가 무슨 소용이람' 싶을 거다. 이 말은 곧 '왜 쓰느냐?'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책에는 '어떻게'와 '무엇'만 있지 '왜' 쓰느냐가 없다. 정작 그게 더 중요한 물음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에 구자행은 "시 쓰기는 참 즐거운 활동이다. 또 한편으로는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숨구멍"(6쪽)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제 할 말을 다 토해내는 민주 세상인데, 무슨 소리냐 하겠제만 어른들은 아이들 말을 듣는 데 너무 서툴다. 아이들이 속엣말을 토해내면 팔짱 딱 끼고 '요즘 것들은 참 싸가지 없다니까', '정말 이것들 답이 없다'는 말부터 줄줄 흘린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이오덕은 사람이 코로 숨을 쉬지만 마음의 숨은 표현으로 쉰다고 했다. 왜 쓰느냐는 결국 꽉 막혔던 숨구멍을 트고 마음의 숨을 쉬게 해서 아이들 목숨을 지키고 키워가는 일보다 더 큰 뜻이 어디 있고 더 위대한 수업이 어디 있겠는가.
뜻이 세워진 다음에 할 일은 종이 꺼내놓고 쓰게 하는 일이겠다. 대개 제목이나 주제를 주고 쓰는 게 대부분이지만 아이들 처지에선 언제나 막막하다. 뭘 쓰냐, 어떻게 쓰냐, 얼마만큼 써야 하냐는 물음이 터져나오기 일쑤다. 이러면 모처럼 잘해봐야지 하고 먹었던 마음마저도 푸시시 꺼진다.
시를 쓸 때는 마음이 쏠리는 대상이나 부분을 놓치지 말고 자세히 살피는 눈을 가져야 한다. 자세하게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대상에 마음이 다가간다.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대상에 마음이 머물면서 자기만의 느낌이 일게 되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106쪽)
'그리는 시'가 대상을 자세히 그려야 한다면, '혼자 말하는 시'는 상황을 또렷하게 그려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그려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솔직한 자기 마음을 드러내면 된다. (43쪽)
말이 길어지고 자꾸 설명하려 들면 시가 느슨해진다. 팽팽한 맛이 살지 않는다. 말맛이 팽팽해야 가락이 살고, 가락이 살아나야 시가 된다. 그러자면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필요 없는 말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63쪽)
1부 마지막에 <시를 보는 눈>을 펼쳐보인다. 시를 가르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이들 시를 읽는 어른도 시 보는 눈이 올바로 박혀 있어야 한다. 어떤 글이 정직하고 어떤 글이 가치있는 글인지를 보는 눈이 없고서는 시 쓰기든 시 읽기든 올바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무엇을 쓸까?'라는 제목처럼 고등학교 교실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교실에서도 해보면 좋을 듯한 쓸거리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멋진 불평'이나 '선생님 관찰 기록'은 나도 아이들한테 단골로 주던 쓸거리였다.
구자행 말처럼 보고 듣고 겪고 느낀 대로 토해내는 말만큼 진실한 자기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처음엔 단순한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귀에 솔깃한 일들을 쓰겠지만 아이들이 쓴 시가 한 편 한 편 모이면 이야깃거리는 한결 풍성해지고, 그만큼 시에는 아이들 눈으로 본 사랑과 세상과 삶이 담기고 말고다.
앉은 자리에 두 권을 다 읽었다. 조곤조곤하면서도 우렁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시든 글이든 잘 쓰는 일보다 쓰려는 마음이 먼저라는 말에 고개 끄덕여본다. 왜 안 그렇겠나. 쓰려는 마음이 없는데 쓰라고 하면 마음이 오그라드는 억압이 된다. 진저리 나는 숙제가 된다. 그 느낌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글쓰기는 괴롭고 고단한 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
무슨 글이든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게 놀이가 되면 더욱 좋겠다. 놀이가 되면 머뭇머뭇 뒷걸음질 치던 마음도 슬금슬금 되돌아온다. 그다음, 그다음은 절로 된다. 보고 듣고 말하고 일하고 투덜대고 실룩대고 실수하고 분통 터뜨린 일들이 시가 되고 자라난 이야기가 되고, 나와 둘레를 꽃피우고 세상을 바꾸는 기록이 되지 않겠나. 그 길을 구자행이 교실에서 몸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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