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이름이 기억 안 날 때, 이렇게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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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련 기자]
복도를 지나가다 작년 우리반이었던 아이들을 우연히 만났다. 나는 반가워 두 손을 마구 흔들며 인사했다. 아이들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선생님의 '님'자를 길게 부르며 나에게 총총총 다가왔다.
작년 아이들은 유난히 애틋했다. 코로나라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각별하게 서로 의지하고 응원해주는 경험을 많이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이에는 끈끈한 동지애와 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본 아이들에게 '얘들아. 잘 지냈니?'하고 두루뭉술하게 인사하기보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년 전도 아니고 몇 달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인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마흔이 된 나는 어느새 흰머리는 뽑을 수 없이 많아졌고, 기억력은 점점 나빠져 이처럼 당황스러울 때가 생기곤 했다.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알면 아이는 얼마나 서운할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이 이름을 어떻게든 기억해 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지? 생각이 안 나. 이 아이 이름만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그 옆에 아이 이름도 생각이 안 나. 큰일 났다.'
하지만 이런 오리무중 상황 속에서 또렷하게 기억 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의 꿈이었다. 이름은 전혀 생각이 안 나도 그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어했는지는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대신 꿈을 불러주었다.
"유튜버, 잘 지냈어?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5학년 되니까 어때?"
"일러스트레이터, 지난번 선생님 책상 위에 놓고 간 편지 너무 감동이었어. 요즘은 어떤 책 읽어?"
다행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아이들 마스크 위로 싱그레 웃는 눈이 보였다.
▲ 4학년 아이들의 꿈입니다 |
ⓒ 진혜련 |
지난 한 해 아이들이 학교에 나온 날을 세어보면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거의 온라인 수업이 이루어졌다. 온라인 수업(줌수업)에서는 항상 먼저 출석을 불렀는데 나는 그때 아이 이름만 부르지 않았다. 아이의 꿈과 이름을 함께 불렀다.
"안과의사 김지원, 야구선수 이수민…."
나는 해마다 학급명부를 만들 때 아이들 이름 옆 칸에 꿈도 같이 적어놓았다. 그동안은 교실에서 출석 부를 일이 거의 없었지만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부터는 매번 부르게 됐다. 출석 확인을 할 때 아이의 꿈과 이름을 같이 불렀더니 나는 어느샌가 평상시 말할 때도 아이들의 꿈을 자주 언급하게 되었다.
"지민아. 역시 과학자는 다르네."
"규현이는 고고학자라 그런지 아주 꼼꼼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도 그랬다.
"파충류 박사. 이 동물 이름 뭔지 알아?"
"야! 넌 선생님이 복도에서 그렇게 뛰어도 되냐?"
우리가 주고받는 말속에는 '꿈'이 있었다.
얼마 전 창의적 체험활동 진로시간에 '나의 꿈' 발표하기 수업을 했다. 나는 수업이 있기 일주일 전 아이들에게 꿈 발표 내용을 미리 준비하도록 과제를 냈다. 발표 내용에는 꿈을 가지게 된 이유, 직업이 구체적으로 하는 일, 꿈과 관련하여 존경하는 인물, 꿈을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할 점 등을 포함하도록 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친구들이 발표를 잘 들으면 맞출 수 있는 퀴즈 문제를 한두 개 내게 했다.
이날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과제를 다 해왔다. 다들 다른 어떤 숙제보다 많이 고민하며 공들여 준비한 게 보였다. 한 명씩 나와 발표를 했는데 나는 친구의 발표를 듣는 아이들의 태도가 조금 놀라웠다. 딴짓하는 아이 없이 PPT 발표 자료가 보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퀴즈를 맞히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친구들의 꿈 이야기가 꽤 궁금한 듯했다.
한 친구가 발표를 마치면 나는 '누구누구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다 같이 응원해줍시다"라고 마무리 말을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가도록 "와!" 하고 환호를 보내며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그건 마치 친구를 향해 '너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해! 너는 꼭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늘 꿈꾸며 살아가길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그냥 평범한 열한 살 아이로 보이지 않는다. 이휘소 같은 물리학자가 될 아이, 코코 샤넬 같은 패션디자이너가 될 아이, 칸딘스키 같은 화가가 될 아이로 보인다. 그렇게 되니 나는 내 가르침에 좀 더 신중해지고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꿈을 가진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렇다.
며칠 전 도서 팟캐스트에서 한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딸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께 "딸의 꿈이 뭐였어?"라고 물으면 "작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고 했다. 꿈은 그런 것이었다. 다른 기억은 다 잃어도 끝까지 기억나는 것. 꿈이라는 건 이름보다 그 사람을 더 잘 나타내는 것 같다. 그건 꿈이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이들이 늘 꿈을 갖고 살아가길 바란다. 꼭 그 꿈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꿈을 이루어야 빛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가진 순간부터 빛나는 것이므로. 꿈을 가진 아이는 반짝이는 별이다. 나는 그 별을 보며 아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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